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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

2017. 10. 14. 05:03



 "전 크리스틴 씨처럼 연기를 하고 싶어요."


 사무소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각자 꿈을 가지고 있다. 배우의 꿈, 가수의 꿈, 아이돌의 꿈. 그들은 대체로 그 꿈을 먼저 이룬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틴 로랑도 분명 그런 이야기의 흐름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코우타는 낯선 이름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결국 생각이 나지 않아 되물어야 했다.


 "크리스틴 씨?"

 "크리스틴 로랑 씨 말이에요! 무성영화 전문 배우인..."

 "로랑...... 아! 그 대배우 팬텀 로랑 씨의 자제분 말씀이시군요!"


 코우타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 아이는 살짝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코우타가 담당하는 배우 지망생이다). 뭔가 잘못 대답했다는 걸 직감한 코우타는 아... 하고 말을 얼버무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맞아요, 팬텀 씨의 딸. 제가 이름을 이야기하면 다들 꼭 그렇게 대답하신다니까요. 그야 팬텀 씨가 유명하긴 하지만... 언젠가는 크리스틴 씨가 더 유명해지실 테니까요!"

 "이야~... 아하하. 죄송합니다! 무성 영화는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 말입니다. 연기를 잘 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네! 정말로 잘해요! 대사는 한 마디도 없는데. 표정만으로 그렇게 많은 걸 전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연기할 수 있는 걸까요."

 

 저도 언젠가는...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릎 위에 놓아두고 있었던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 얼굴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들떠보였다. 코우타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꿈을 꾸게 하는 존재ㅡ그게 사람이든, 어떤 사건이든, 무엇이든간에ㅡ에 관심이 있었다. 크리스틴 로랑의 연기는 어떤 매력으로 그의 담당 지망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매니저로서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모처럼의 한가한 휴일. 코우타는 때마침 개봉한 크리스틴 로랑 주연의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와 있었다. 코우타가 아는 흑백무성영화는 찰리 채플린 시대에서 멈춰 있었다. 지금이 2270년대인 걸 생각하면 최소 300년 전의 일이다. 아무리 관심이 없던 분야라고는 하지만 300년 동안 업데이트를 안 했다는 사실에 코우타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는 팝콘도 콜라도 들지 않고 빈 손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색색의 화려한 광고가 지나간 후에 영화가 시작되었다. 스크린 위의 세상은 조용하고 흑백이었다. 코우타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는 모든 사진과 영상이 흑백이며, 따로 녹음한 소리를 덧입혀야 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안드로이드와 인공지능의 시대를 사는 그에게는 까마득하게 먼 옛날이다.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비추고, 시계탑을 비추고.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틴 로랑이 화면에 비쳤다. 그녀가 서있는 곳은 기차역이었다. 1900년대 초 유럽의 것으로 보이는 검고 거대한 열차 속으로, 코트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수많은 사람들이 빨려들어가듯 들어갔다. 그녀는 혼자 우두커니 서서, 기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빛과 사람들의 그림자가 그녀를 번갈아가며 비췄다. 흑백 영화에서는 빛의 표현이 도드라진다는 걸 코우타가 머릿속에 메모해두고 있을 때 쯤, 크리스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 화면 속 크리스틴 로랑은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클로즈업되면서, 그녀는 깜빡, 하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고는 이쪽을 향해 머뭇거리면서도 반가움을 표현하듯, 작게, 조금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 숙였다.


 영화는 1인칭 시점처럼,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를 의식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아니, 어쩌면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을 영화 속 주인공 자리에 세워두기 위한 연출일지도 모른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팝콘과 과자를 들고 영화관에 들어왔는데, 그 어디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영화관은 어딘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찰리 채플린이 깨진 유리를 수리하던 300년 전 정도의 시대로. 크리스틴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관객들을 과거로 이끌었다. 그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영화는,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흘러 갔다. 영화 속의 크리스틴은 떄로는 웃고, 때로는 울었고, 사소한 일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으며, 꽃을 받아들고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화면 속 크리스틴 로랑은 사랑스러웠다. 영화관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 찍은 영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그리고 또 헤어졌다. 영화 속의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으로 마무리지어졌다. 그러니 영화의 끝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장소는 영화가 시작했던 바로 그 기차역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그녀는 여전히 기차역에 서있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와 함께했던,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도 이제 그녀를 남겨두고 기차에 올라타려고 하고 있었다. 영화 속의 크리스틴은 남겨지는 사람이었고,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영화관의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슬프길 바라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슬플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울어야 했다. 출발하는 기차 안에 있는 누군가의 시점으로, 여전히 기차역에 가만히 서있는 크리스틴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입을 움직였지만 뭐라고 말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 헤어짐 앞에서 크리스틴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코트의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 동안에도 계속 크리스틴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크리스틴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그녀는 각오를 굳힌 듯,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표정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그녀를 남겨둔 채 달리는 기차의 경적 소리가 크게 울렸다. 카메라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도 한참이나 창문 밖을 비췄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다. 코우타를 현재로 돌려보낸 것은 영화관 어디선가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였다. 


 화면이 암전되고, 그 이후에는 고정된 시점이 기차역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건 여전히 기차역을 떠나지 않는 크리스틴의 뒷모습이었다. 스태프롤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글자 너머에는 계속해서 기차역에 서있는 크리스틴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주연 소개인 줄 알았던 코우타도 결국엔 그 의도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영화관의 관객들이 전부 떠남으로써 영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코우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의 계단을 내려갔다. 영화관을 나가는 도중에도 그는 몇 번이고 스크린을 돌아보았고, 마지막까지 크리스틴은 이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기차가 사라진 철도의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

...






 다음 날 코우타는 부은 눈가를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 출근해야 했고, 행사장으로 차를 모는 내내 크리스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담당 아이돌을 질리게 만들었으며, 크리스틴 로랑의 이름을 듣고 제일 먼저 "팬텀 로랑의 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핀잔을 주는 버릇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