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커뮤

인간쓰레기

2015. 7. 26. 03:21

 

 

 

 

 유스호스텔에서, 무대에 올라섰던 여학생이 쓰러졌을 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희망봉 학원의 요원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요원을 다그치거나 여학생을 걱정하는 동안, 그저 조용히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구급차가 도착하고 여학생이 실려나갔다. 그리고… 방송이 울렸다. 이 모든 상황은 연출된 것이었고, 입학 시험의 일부였다, 하고.

 

 누군가 화를 냈고 누군가는 겁에 질렸다. 또 누군가는, 여학생이 정말로 다친 게 아닌가 의심하고 걱정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아무리 유명하고 까다로운 학교라고 해도, 그런 시험을 보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저 한 가지 생각만이 그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감점, 당했으면 어쩌지.

 

 

 

 ……나중에,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문득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우리 가족은 나를 걸고 도박을 했다. 희망봉 학원 한국 분교의 입학과 졸업이 목표였고, 보상은 그 뒤에 따라올 성공이었다. 넉넉치 않은 살림에 학원비에 돈을 쏟아붓고 빚까지 끌어다썼다. 멍청한 짓이라고 비난받을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충분히 죽은 듯이 살았다. 기적 같은 성공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계속 내리막길을 달릴 거란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얌전히 학원에 다녔다. 열아홉살이 되도록 스카우트를 받지 못하고, 집에 남은 빚이 얼마인지 들었을 때, 여기서 실패하면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는 순간 모든 걸 체념하고 내게서 고개를 돌리는 가족들을 상상했다. …… 그러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버린 패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비록, 이런. 학원이 학생들을 감금하는 이상한 상황이라도. 사실은 희망봉 학원에 입학했다는 사실 자체가 면죄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노력했고 그 결과 이곳에 입학했다. 내가 할 일은 다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저 가만히, 구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이다.

 

 

ㅡ 너네가 "초고교급 학생으로 시험에 통과한 합격자라는 이야기"…… 그건 어떻게 믿는 건데?

 

 

 

 ……그러나 만약에라도 내가 초고교급이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아무 노력도 없이 보냈던 시간을 과연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뭘 위해 여기에 왔는지 깨달았다. 친구를 사귀기 위함도, 요리를 하고 매일 멍하니 지내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입학과 졸업을 마치고 가족들에게 다른 삶을 안겨주는 것. 그것만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의미였다.

 

 고기를 먹기 위한 젓가락을 챙기면서, 작은 식칼 하나를 챙겨 파우치에 넣었다. 자세한 계획까지는 생각해낼 수 없었다. 이 중에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못 하더라도 언젠가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벽에 준비실에 왔다. 일단은 칼을 숨겨놓기로 했다. 그러면 졸업하기 위해 조금은 노력한 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나는 소품 박스 깊숙히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때.

 


 

 "……우진……."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

 

 

 

 


 "아, 안녕하세요? …"


 준비실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언제 왔어?"

 "아, 아까… …안 주무세요…?


 아까, 같은 말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잠이 안 와서. 그러는 너는……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뭘… 잊어버려서 찾으려고…. …무용실에서 두석한테도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하셔서…"

 "…떨어뜨린 거야? ……뭔진 몰라도, 이 주변에서 특별한 건 못 봤는데."

 "아, 그… 그래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찾아볼게요…."


 잃어버린 물건 같은 건 찾지 말고 방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뭔지 말해주면… 같이 찾아볼 수는 있는데."


 내 시선이, 야구 방망이를 향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다.

 


 

 "앗, 그래주신다면… 가… 감사해요. 저어… 그게 그… 칼인데…… 작은 커터칼이요."

 "커터칼…? ……그래. 그럼 난 이쪽을 찾아볼게. 그쪽에 있나… 한 번 찾아봐."

 "네에… 정말 감사해요……."


 

 ……거기서 나를 믿고, 뒤를 돌지 말았어야 했다.




 조용히 야구 방망이를 잡으면서 생각했다. 운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한 밤 중에, 살인을 하려고 다짐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 혼자서 찾아오다니.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아까 왔다면, 어쩌면 칼을 숨기는 걸 봤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말하기라도 하면… 모든 기회가 사라진다. ……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예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여리고… 착한 사람.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나는, 내가 초고교급이라는 걸, 졸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가족들에게. 희망봉 학원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증명할 것이다.

 




 나는 있는 힘껏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 ……."

 "……."

 "아…… 아아…… 아? ……."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기절조차 하지 않았다. 놓친 방망이가 바닥을 굴렀다. 나는… 숨을 골랐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 앞에 안나예가 쓰러져있다. 안나예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로 간신히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나를 보는데. 그게… 그게 모두 현재진행형이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안나예가, 울면서…… 말했다.


 "미… 안해요, 잘못했어요……."

 "……."

 "때리지 마세요……."

 "…………."


 차라리 누군가 나를 칼로 찔러줬으면.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줬으면. 그러나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나는 이대로 안나예를 죽이게 될 것이다. 잠시동안 아주 많은 변명을 생각해냈다. 나는 여기서 나가야 된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가 없으면 못 사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진짜 초고교급이라는 걸 증명해낼 때까지, 나도 우리 가족도, 죽어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그녀가 우는 걸 보고 있는 사이에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미… …늦었잖아."


 그것뿐. 늘 그랬듯,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떨었다. 떨었지만, 도망치지도 못했다. 불쌍한 안나예. 그냥 운이 안 좋았을 뿐인, 불쌍한 여자애. 목도리를 잡는다. 그녀가 짠 목도리는, 부드럽고, 푹신하고, 따뜻했고, 나는, 그걸, 아주 세게








*





......

.........





 그렇게.

 안나예가 죽었다.




 나는 그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앞에 죽은 안나예가 있다… …머리가 멍해서, 이게 현실인가, 하고 잠깐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서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렀다. 그리고 아무리 오랫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더라도, 영원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ㅡ나중에 너한테 요리 배우거나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

 ㅡ…내일도 괜찮아요~ …내일 같이 할래요?

 ㅡ……정말로?



 안나예가 죽었다. 죽었다… 그 말이 계속, 나레이션처럼, 눈 앞에 있는 걸 똑바로 보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되풀이된다. 그러나 그 말을 곱씹을수록 머리는 더 멍해져갔다.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죽었다는 말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죽었다는 게, 대체 뭘까.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훨씬 더 길고 끝나지 않는 문장이어야 한다. 한 사람이 더 이상 숨을 안 쉬고 말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그게 앞으로도 쭉 계속되는… 그런… 그런 상황을, 단어 하나로 정리해버릴 수는 없는 거였다.



ㅡ……응… 네가 괜찮다면. ……부탁할게.

ㅡ…내일 같이 하기 약속?

ㅡ…응. 약속. 내일 꼭 가르쳐 줘.



 앞으로도 쭉 계속되는……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명치부터 심장까지가 푹 꺼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녀와 같이 만들었던 요리는, 첫 번째가 카레. 두 번째가 볶음밥. 그리고 세 번째가 국수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에서 끝났다. 안나예와 같이 요리를 한 건 단 두 번이었고, 이제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ㅡ잘 자. 내일 보자. ……약속 잊지 말고.

 ㅡ…우진이야말로 약속 잊으면 안 돼요? …내일 봐요….



 

 나는 나예가 했던 인사를 떠올렸고.

 ……그 순간 도저히 그녀를 더 볼 수가 없어서, 모자를 깊게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