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텐트의 초상, ■번 째>
초상화 앞에 남자가 서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그런 그를 끌고 나가려는 경비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초상화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낯익은 얼굴이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는 운명을 느꼈다. 그건 분명히 운명이었다. 남자가 지금까지 계속 기대어 왔던 그의 이정표. 그러므로 그는 자신들을 단단히 가두고 놔주지 않는 미술관을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상한 일 역시 미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하노 하노코가 죽고, 그녀의 유령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죽은 사람들은 다른 기억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꿈 속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했다. 마치 정말로 그 꿈을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그 중에는 유우토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추억은 진짜였다. 이야기에 담겨 있는 그들의 감정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그렇기에 남자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만약 꿈 속의 유우토가 실재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곳에 있는 남자는 무엇이 되는가. 그림 속 아마릴리스에 입을 맞추고, 철골 위에 있던 파란 장미를 집어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 느껴왔던 모든 운명이, 단지 꿈 속의 아카네 유우토가 살아왔던 삶을 따라가는 것뿐이었다면... ...
남자는 생각을 멈추고 초상화 한 점을 집어들었다. 그림의 묵직한 무게가 손에 전해져왔다. 삶에 확신을 주는 것은 자극이다. 손에 확실히 전해지는 충격. 그러므로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망치를 꺼냈다. 나의 -을 돌려 줘. 돌려받고 싶은 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삶 그 자체였을까. 남자, 유우토는 망치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들을 향한 사랑과, 그들이 알고 있는 아카네 유우토를 향한 증오를 담아서.
*
수집가 아카네 유우토의 저택 뒤에는 묘지가 있다. 그곳은 사랑의 무덤이었다. 끝 없이 세워진 비석에는 날짜와 함께, 그곳에 잠든 존재에게 바치는 사랑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어느 수집가가 사랑한 미술품들이 잠드는 땅. 아니, 수집가에게 살해당한 미술품이 묻혀 있는 땅.
작은 저택 안에서 유우토는 사랑을 했다. 돌아오는 것 없는 사랑이었다. 미술품은 단지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고, 유우토는 그런 그들을 향해 끝 없는 사랑을 고백했다. 어떨 때는 일생일대의 프로포즈를 하듯 당당하게, 또 어떨 때는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듯 비밀스럽게. 어떤 고백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렇기에 사랑을 말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록, 그 후에 찾아오는 정적의 공허함 역시 커졌다. 유우토는 손을 뻗었다. 그 두려운 순간을 견뎌내기 위한 도구들은 언제나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놓여 있었다.
고백이 끝난 후, 정적의 끝에서, 유우토는 망치로 화려한 액자를 부쉈다. 정교한 조각상을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냈다. 누군가의 영혼이 담긴 그림을 칼로 찢었다. 깨진 조각이 튀어 뺨에 상처가 나도, 손을 베여 피가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 순간은 유우토가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성을 버리고, 감정에게 온몸을 내주는 순간. 인간으로서 가장 질 낮은 순간에서야, 유우토는 가장 행복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랑하던 것들을 부수고 숨을 고를 때, 그는 자신의 삶이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사랑하는 존재의 마지막 순간을 온전히 소유하는 기쁨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의 삶이 망가진 건, 전부 꿈 때문이었다.
유난히 길고 생생한 꿈을 꾸고 일어났던 날, 유우토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음에도 살인자가 되었다. 그의 손에는 누군가의 목을 조르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사람을 죽인 밤에 느꼈던 감정은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지 않은 사람은 평생 알 수 없을 압도적인 불행과 행복. 어느 날 들렸다는 신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삶의 계시가 되어버리듯이, 그에게 꿈 속의 감정은 그를 이끄는 거대한 운명이 되었다.
그 이후의 삶은 오로지 사랑을 찾아 헤매고, 또 파괴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유우토는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을 느낀 작품들을 수집하고, 파괴하고, 슬퍼하며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들을 땅에 묻었고, 비석을 세운 후 오래도록 추모했다. 유우토의 공허한 삶은 어쩌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눈이 먼 미치광이의 이야기는 언제나 진부하고 예술적이니까. 그리고 그런, 진부하고 예술적인 비극의 결말은 대체로
*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망치가 그림에 닿기 전이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들린 소리 같기도 했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유우토는 들고 있던 그림을 떨어뜨렸다. 누군가 그의 뒤에 서있었다. 하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목이 아프다. 숨을 쉴 수 없다. 눈 앞이 빨갛게 변했다. 떨어진 그림을 향해 손을 뻗고 싶었지만,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에 감긴 줄을 잡았다.
등 뒤에 있는 건 살의였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명백한 의도를, 목을 꽉 조인 줄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구도였다. 자리가 바뀌었을 뿐. 끔찍한 고통과 공포가 이번엔 그의 몫이었다. 아니, 정말로 그의 몫이었을까. 이건 꿈 속의 유우토가 받아야 할 몫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기억은. 이상하게도, 슬프게도, 그리고 분하게도, 수집가인 유우토가 살아온 삶이 아니라 꿈 속의 기억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과, 그가 받게 되었던 벌.
"... ...!"
아, 나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경험했지만.
"...! ... ...!"
단 한 사람의 고통만은 겪을 수 없었어.
"...아,"
내가 죽인,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 ..."
머리가 멍해졌다. 기억이 엇갈렸다. 증명되지 못 한 삶이 말했다. 사랑을 하고 싶었어. 늘 외로웠어. 나를 채워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었어. 비록 이런 삶을 살았어도, 내게는 언제나 꿈이 있었어. 사랑하는 나의 그림들, 내가 끝 없이 찾아 헤매왔던 나의 운명. 나의 사랑. 나의... ...
미래의 연인, 너만은.
너만은 그리워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고 싶었는데.
삶이 끝나는 날까지, 오로지 너와 둘이서 살아가고 싶었어.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는, 올바른 사랑을 하는 인간의 삶을... ...
유우토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의 삶은 그곳에서 끝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꿈 속의 존재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자신의 삶조차 온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수집가였던 아카네 유우토의 삶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액자 속에서 그를 닮은 살인자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