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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8. 6. 20. 22:07



 "자네는 언제나 날 두렵게 만드는군."


 시선을 돌리지 않는 올곧은 눈빛을 본다. 웨일은 자주 룬을 투명한 바다에 겹쳐보았다. 한 때 그의 기억 속에는 햇빛을 머금어 투명하게 빛나던 바닷물이 있었다. 흰 거품을 일으키며 넘실대던 파도와, 몸을 감싸는 시원하고 습기 찬 공기. 수면 아래로 보이는 물고기의 그림자를 반기고,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의 모습을 보기 위해 뜨거운 햇살을 손으로 가렸던 기억. 


 그것은 과거에 남은 바다의 기억이다. 칼날로 비집어 연 피부 사이로 피가 퍼져나와 바닷물을 흐리고, 난파된 배의 나무 조각이 바다의 밑바닥에서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는 탁해져가는 바다를 기억하는 죄인이자 증인이었다. 물은 다른 색이 순식간에 번지는 곳이다. 깨끗한 것은 쉽게 더러워진다. 


 "알고 있네. 자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자네가 여전히 나를 친우라고 부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죄인의 곁조차 떠나지 않는 그 올곧은 신뢰를 경외해. 그러니 부디 자네와 나를 죄인이라는 말로 묶지 말아주게나. 나는 자네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재앙이 지나간 이후로 웨일은 삶에 남아있던 것들을 하나씩 버렸다. 직업, 길드, 가족, 그 밖의 모든 관계를. 그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죄는 끝없이 불어나 이제는 숨을 쉬는 것마저 죄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허락 받을 것을 상정하지 않은 삶이었다. 혼자 맞이할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함께 살아갈 삶을 각오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산호의 색을 닮은 두 눈이 여전히 웨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웨일은 자신의 안일함을 깊게 후회했다. 잠을 잘 때는 등을 돌리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어떤 약속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것은 신의 벌보다도 두렵고, 어떤 비난보다도 그의 죄를 투명하게 비추어냈다. 다시금 갈림길에 서있다. 옳은 길이 어느 쪽인지 알고 있다. 웨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번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앞을 떠나지 않은 친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밖에 나갈 때쯤엔 화관의 꽃도 전부 시들겠지. 자네에게는 아직 나를 잊을 기회가 남아 있네. 시간을 들이면 잊지 못할 건 아무 것도 없어. 둘도 없던 친구의 얼굴도 오래도록 마주하지 못하면 이내 사라지기 마련이니."

 "……."

 "……그럼에도 자비를 베풀겠다면, 자애로운 히밍래바, 나의 친우 룬."


 웨일이 룬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닿지 않는 손길은 시늉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같은 말은 꺼내지 말아야 했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눈을 돌린다. 웨일은 작은 침대에 함께 누워 이야기를 나누던 밤을 떠올렸다. 


 "내게 시간을 주지 않겠나. 죄인으로 살아온 시간을 후회하고, 감히 자네의 곁에 친우로 남기 위해 각오할 시간을. 그 시간동안 부디……."


 욕조에서는 바닷물의 냄새가 났다. 작은 마을에서 벌이는 축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하룻밤이 웨일에게는 아득할 만큼 길었다. 밤의 길이만큼 할 수 없는 말이 늘어났다. 그 날 밤, 몸에 남은 피 냄새가 느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는 말을. 더러워진 손이 아직 깨끗하고 어린 삶을 탁하게 만들까 두려웠다는 말을. 언젠가 떠날 테니 괜찮으리라고, 친절을 밀어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목을 졸리던 새벽에, 그 작은 마을에 가지 못할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는 말을…….


 "다시 자정이 되기 전에 방으로 돌아와, 함께 누워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허락해주게나."


 그 모든 말을 삼키고도 이 자리에 서있다. 그것은 8년간 살아오며 해왔던 어떤 각오보다도 두려운 일로 남았다. 누구도 미워하지 못하는 가여운 히밍래바에게, 죄인은 또 하나 죄를 지었다. 바다는 그의 죄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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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8. 6. 14. 17:40



 ㅡ 웨일, 내가 잘 돌아왔다는 말을 했던가?


 그것은 예상 외의 말이었다. 웨일은 미쥬의 표정을 읽기 위해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옅은 미소를 띈 얼굴이었다. 아니, 조금은 달랐다. 하지만 그 감정을 구체적으로 짚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슬퍼하고 있는가. 또는 두려워하고 있나. 가장 먼저 사람을 죽이고, 죽음을 지나가는 일처럼 생각하라고 말한 남자가.


 미쥬 나다엘은 유능한 상인이었다. 웨일 역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때 상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우상처럼 떠받들어지기도 했다. 그 어떤 물건도 팔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도, 그것을 허투루 쓰는 대신 공익을 위해 노력하는 상인.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수입해 온 무기로 사상자가 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악담이 점점 많아졌다. 악마에게 씌였다, 돈을 많이 버니 이제 욕심에 눈이 먼 것이다, 처음부터 본성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수많은 말 속에 아직 젊었던 웨일은 생각했다.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한 순간에 바뀔 수 있을까, 하고.


 "……그래."


 이제는 웨일도 안다. 어떤 운명적이고 거대한 사건 하나가,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쥬 나다엘이 뛰어 올라가던 기나긴 계단을 떠올렸다. 수많은 무기가 그의 몸을 꿰뚫던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오로지 하나의 길을 앞에 두고,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왕좌를 향해 달려가던 그 아득할 정도의 맹목. 그러나 동정하지 않았다. 돌아온 그에게도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웨일은 미쥬가 건넨 말 앞에서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말을 계속 곱씹으면, 조용히 묻어두었던 미쥬 나다엘의 죽음에 대한 감상이 파헤쳐질 것 같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아니더라도, 더 이상 누구도 이곳에서 죽지 않도록 빌게."

 "……."

 "만약에라도 우리 중 누군가가 또 다시 죽음을 맞이하고, 남은 사람들이 재판을 위해 떠나야 한다면……."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갇혀 산 자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망자의 모습을 본다. 웨일 역시 미쥬 나다엘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감정을 떠나 도리의 문제였다. 하지만 미쥬 나다엘의 말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이,


 "이곳에서 계속 기다리고 기도해. 우리의 무사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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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냐냐#……

2018. 6. 1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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