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웨일은 익숙한 갑판 위에서 눈을 떴다. 뜨거운 햇빛이 바지와 구두 사이로 드러난 발목을 태우고 있었다. 햇빛과는 대조적으로 시원하고 습기 있는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갔다. 배가 파도를 가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귀에 들어왔고, 눈이 시릴 만큼 깨끗한 하늘에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졌나. 짐작이지만 아마도 맞을 것이다. 아카데미 길드에 초청될 만큼 유능한 항해사의 감이니까. 그 사실을 증명하듯, 곧 갑판 위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 웨일?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함께 배를 탄 친구의 목소리였다.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고 파도 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다. 그러나 친구의 얼굴은 흐릿한 윤곽뿐이었다. 그 이유를 웨일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기억의 균열을 깨닫는 건 언제나 이 순간이었다. 마지막 교대 시간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으며, 항해사의 감 같은 건 더 이상 믿을만한 게 못 된다는 것을. 웨일은 보이지 않는 친구의 얼굴을 향해 답했다.
아니, 이제……
일어나야지. 다시 눈을 뜨자 이번에는 낯선 곳이었다. 웨일은 바닷물에 잠긴 자신의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나풀거리는 것을 보았다. 이만큼 선명한 꿈을 꾼 것은 오랜만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 근처에 놔둔 포푸리가 보였다. 청량하고,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그리운 향기. 바다를 퍼내어 주머니 안에 담은 것 같은 정확한 바다의 향이었다. 웨일은 침대 속 바닷물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오래도록 포푸리의 향기를 감상했다. 그는 아름다웠던 바다를 기억한다. 언제까지나 올곧을 것만 같았던 기억이다.
*
그러니 그 친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웨일은 눈 앞에서 웃는 소녀를 보았다. 언제든 손을 내밀고 있겠다는 말을, 어떻게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건네는가 생각하면서. 사람은 베풀기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계속되는 불행 앞에 꺾이지 않는 마음 역시 없는 법이고. 그럼에도 이 어린 인간은 현실을 초월할 것처럼 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삶도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결국 웨일은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눈 하나 깜빡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고, 적당한 말로 메리포르샤를 안심시켜 영원히 기다리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친절에 대한 마지막 도리이자,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처럼 생각되었기에.
"원래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네라면 계속 내게 친절을 베풀 것 같으니 미리 말해두도록 하지."
웨일은 잠깐동안 메리포르샤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 작은 손의 손등 위를 덮었다. 서늘한 웨일의 손이 서서히 따뜻한 메리포르샤의 손에 있던 온기를 빼앗아갔다.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웨일은 잠시 안심했다. 안심이라니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가 자네의 손을 잡는 일도, 자네가 내게 필요 이상으로 기대는 일도 없길 바라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로 잠깐동안 의지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게 신경쓰지 말아주게. 자네의 친절이 기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건 기억해줬으면 좋겠군. 다만 나는……."
"……."
"……내가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것이나, 지금껏 살아온 곳을 자네에게 알려줄 수 있을 만큼 떳떳한 사람이 못 되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웨일은 손을 놓았다. 어떤 향기는 다른 향기를 지워버린다. 어쩌면 그건 이미 향기라고 부를 수 없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웨일은 그의 향을 메리포르샤 포포론의 기억에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유일하게 옳은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