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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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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일이지. 자네 말대로 적보다는 친구를 만드는 게 현명한 일일 텐데."


 다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이곳에 와서 몇 번을 들은 질문이었던가. 웨일은 그 질문에 한 번도 고개를 저은 적이 없었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배가 침몰하지 않게끔 일부의 짐을 바다에 던져버리듯이. 아니면 해적에게 인질을 잡힌 선원들이 어쩔 수 없이 요구에 따라 목숨을 버리듯이…… 최선을 고민하고 또 골라도 결국에는 최악을 피할 뿐인 선택들. 열을 잃고 하나가 남아도 이것이 최선이었다며 위로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상황이 말이다. 


 "그런데 삶은 늘 차라리 적을 만드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게끔 흘러가더군."


 그러니 이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웨일은 가루다의 가슴 깊이 박힌 칼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입은 열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재판이 무사히 끝나더라도 더 이상 이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그것이 무력하게 또 한 번 살아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일 테니.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인어가 버텨내기 힘겨운 소각로의 열기에도 가루다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였다. 늘 베일 뒤에 가려져 있던 눈을 이렇게 보게 되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친구라는 말에 새로운 기대를 걸었던가. 8년의 삶을 뒤집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나. 언젠가 바닷속 깊은 곳에 가라앉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은 적이 있었다. 오로지 피곤하다는 느낌만이 몸에 남아, 등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멀어지는 빛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기억. 어쩌면 지금도 비슷한 기분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무사 귀가를 위하여, 건배사와 함께 잔을 부딪혔던 기억이 아직도 손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다음은 더 독한 술을 가져오겠다던 그의 말도. 


 "……끝나면 또 술이 필요하겠어."

 "……."

 "자네의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았기를. 그 표정이 거짓된 것이 아니기를 바라네, ……친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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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양보하는 사람보단 이기적인 사람이, 삶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보다는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좋네. 보기에 안심이 되거든."


 웨일은 체니의 태도에서 이렇다 할 부자연스러움을 잡아내지 못했다. 개운하다는 말에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막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을 만끽하는 자에게 굳이 지적할 정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웨일에게는 그럴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웨일은 다만 잠시동안, 체니가 베일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했다. 검은 베일은 체니의 얼굴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 어떤 추측에도 답을 내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다시 체니 줄리엣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만난 지 두 주가 채 되지 않은 사람들, 서로를 죽이라는 명령, 발견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탈출구. 신뢰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며, 이곳에서 그 위험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 게 현명할 것이다. 당장 체니 줄리엣과 잔을 나누고 있는 정체 모를 인어가 범죄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가 체니 줄리엣에게 건넬 유리잔에 독약을 발라놓지 않았을 거란 확신을,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의심만으로 버티는 것도 생각보다 힘든 일이니, 곧 이 안에서 신뢰할 만한 인물을 찾아낼 수 있기를 기원하지. 자네의 안목으로 충분히 의심한 후에 말이야."


 웨일은 체니에게서 다시 병을 받아들며 말했다. 그가 병과 함께 가져온 두 개의 유리잔이 나란히 놓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웨일은 잔에 독을 바르지 않았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겐 더 이상 무언가를 희생시켜가며 지킬 만큼 가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윤기 있는 갈색의 양주가 독이 묻지 않은 잔에 담겼다. 웨일은 잔 하나를 체니 앞으로 밀어두고, 나머지 한 잔을 손에 들었다. 긴장감 없는 태도로 잔을 흔든 그가 짧게 웃었다.


 "얼마 전에 가루다 군과도 함께 한 잔 마셨네. 건배사는 그가 바라는 일로 하기로 해서…… 결국 '우리의 무사 귀가를 위하여'였던가."


 양주가 독한 냄새와 함께 찰랑였다. 신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취기 뿐이라는 듯이. 웨일은 술에 잘 취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생각을 완전히 포기할 만큼 술 기운에 이성을 내주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제정신으로, 이 끔찍한 상황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죽음이나 또는 다른 것들을 남몰래 두려워하며.


 "그러니 이번에도 자네가 가장 바라는 일을 위하여 건배하도록 하지. 어떤가, 줄리엣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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