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딱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만큼의 가치를 가진다. 어떤 사람이, 단순히 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게 되는 가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그 순간의 필요에 의해 이뤄지고, 필요가 끝나면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이유도 없어진다.
유우는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 식의 깔끔한 이해관계가 좋았다. 가장 쉽고, 간결하니까. 12살 유우에게는 가치가 있었다. 있어야 했고, 유우는 늘 그걸 신경쓰며 사람들을 대했다. 이제 유우는 죽었다. 그 대신 남겨진 홀로그램은 귀여운 장식도, 따뜻한 체온도 잃었다. 성격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으니 마음껏 다른 사람들의 신경을 긁었다. 가장 빛나는 가치였던 재능도 지금 와서는 아무 소용 없었다. 홀가분할 만큼 그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메구미를 앞에 두고, 유우는 그녀가 어떤 말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기는 필요 없다고 메구미가 말했다. 진심을 확인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관계에서, 몇 마디의 진심을 확인한다고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지.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던 적도, 천둥이 무서웠던 적도 없고,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는 구조가 올 거라는 기대도 버렸어. 버티기 위해 포옹이나 위로가 필요한 적도 없었고."
유우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그건 전부 진실이었다. 여기서 끝내면 그는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진심을 말한다는 약속도 지킨 것이 된다. 메구미가 말하는 '확인'의 결과 역시 눈에 보였다. 유우는 메구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했다. 슬픈 얼굴을 할까. 아니면 그저 무표정할까. 잘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가는 모습도 떠올렸다. 유우가 바랐던 깔끔한 끝이다. 하지만 아주 싱겁고, 그다지 재미있는 끝은 아니었다. 막상 이 순간이 되니 어쩐지 이대로 끝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도,"
고작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전부 처음이었어."
끝까지 묻어둬야 했던 말을 덧붙인 것이다.
"괜찮을 거란 말도, 서로 기대고 위로해주자는 말도.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을 여기 와서 처음 만났어. 네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유우는 메구미를 바라보았다. 자세를 낮추고, 유우와 시선을 맞추는 그녀는 여전히 다정하다. 몇 번의 포옹을 했는지 세어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여러번 서로를 끌어안았다. 누군가 자신을 끌어안을 때, 아니면 쓰다듬을 때마다, 유우는 그 손이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끝없이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럼에도 막상 누군가의 온기가 곁에 있으면 기대고 싶어졌다. 처음이었고, 새로웠다.
"네가 죽었을 땐 화가 나기도 했지.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그 땐 그냥 네가 날 두고 간 게 화가 났어. 곁에 있어주겠다고 해놓고,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빨리 죽어버리다니. 그렇게 생각한 거야. 웃기지? 처음부터 다 연기였던 쪽이 어느 쪽인데."
옛날 얘기야. 그렇게 덧붙이고 유우는 웃었다. 기껏해야 몇 주 전에 일어난 일인데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다. 유우는 그 때의 자신을 비웃는 의미에서 웃었지만,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런 말까지 메구미에게 털어놓진 않았다.
"넌 늘 나한테 다정했지. 죽어서도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도, 가면을 벗었을 때도, 메구미가 죽은 후에도, 그리고 마침내 유우가 죽은 후에도, 변함 없이.
"사실대로 얘기해도 된다고 했을 때, 전부 털어놓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어."
너라면 용서해줄 것 같았으니까. 작게 덧붙인 말이 메구미에게 들렸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널 실망시키지 않고 12살인 채로 죽을까 생각도 했어."
처음 받아본 애정을 전부 버리고, 살인자가 되어 밖으로 나가면, 왠지 공허할 것 같았다. 언젠가 메구미와 처음으로 포옹을 했을 때 생각했던 사탕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한 번 맛본 사탕을 계속 그리워하면서 사는 건 비참해. 비참한 삶과 사랑 받는 채로 맞이하는 죽음, 그런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떤 상황에도 삶을 택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삶에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의심 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비참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메구미는 언제나 유우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유우는, 아무도 없는 새벽에 몰래 주방에 갔다. 과도를 챙겼다. 무방비한 아키라의 등을 밀쳐 떨어뜨렸다. 그래도 거기서 멈췄다면 그를 죽인 건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유우는 망설임 없이 그를 쫓아 달렸다. 그리고 죽였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유우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바뀌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결국엔 그게 가장 진실된 유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 난 내가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했고, 그걸 위해선 누구든 죽일 수 있었어. 당연히 관계도 버릴 수 있었지. 진심이라고 해도 고작 그 정도야. 말로도, 행동으로도 표현한 적 없는 진심은 아무 의미도 없어."
메구미 누나. 유우는 더 이상 시미즈 메구미를 그렇게 부를 수 없다. 연기란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네, 유우는 이제 와서야 그런 생각을 했다. 그 12살 꼬마한테 유우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붙일 걸 그랬어. 그랬다면 나와 그 꼬마를 완전히 분리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 꼬마일 때 했던 대화도, 받았던 애정도, 전부 내 게 아니라고 내쳐버렸을 텐데. 유우는 언제나 완벽하지 못했다. 흉기의 손잡이에 남겨버렸던 핏자국처럼, 미처 지우지 못한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유우는 그걸 지우고 싶었다. 흔적도 남지 않도록. 그렇게 해줄 수 있는 건, 메구미뿐이다.
"네가 알던 유우에 대한 미련이라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나한테 뭘 기대하든 이제 난 아무 것도 줄 수 없어. 다시 연기해달라고 부탁하면 해줄 수 있지만,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싫어한댔잖아.
난 그 말을 믿었어. 너한테 미움받으면, 남은 미련도 깔끔하게 버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난 네가 날 미워하길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