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커뮤'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5.08.28 .
  2. 2015.08.22 [관록] 통행금지 2
  3. 2015.07.26 인간쓰레기
  4. 2015.03.14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5. 2015.03.14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6. 2015.03.14 [ㅇㅇㅁㄹ] zZ (150120)
  7. 2015.03.04 [ㅇㅇㅁㄹ] 자유행동
  8. 2015.03.04 [ㅇㅇㅁㄹ] 사망로그 (150124)
  9. 2015.03.01 [ㅇㅇㅁㄹ] ㄴㅇ님 빵빵빵

.

2015. 8. 28. 21:47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ㅡ백우진.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수많은 고민 끝에 집어들었을 그의 각오가 허무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긴 순간이었다. 그 소리와 함께 두 길의 사이가 벌어졌다. 내가 걸었던 길과 그가 걷게 될 길은 이제 영영 달라지게 되었다.


ㅡ…듣고 있어.
ㅡ…너였지. 여기서 사람 처음 죽인 거.
ㅡ…… ……그래. 나였지. 내가 시작했어.
ㅡ그럼… 나도…….

 


 그는 실패했다. 이제 사람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 밤은.

 아까 했던 대화 속의 박예환이 눈 앞에 있는 현재의 그와 겹쳐진다. 그 때의 그의 표정과, 중간중간 흐리던 말끝. 조용히 들려주던 이야기의 마지막에 그가 말했다.

 

 

ㅡ…근데 지금 와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지. 도와줄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내가 빨리 나가야 한단 말야.
ㅡ…….
ㅡ그리고 붓 잡을 손도 같이 안 다치고.
ㅡ…….
ㅡ그래서…….


 

 그렇게 끊겼던 대화의, '그래서'의 다음에 이어졌을 말. 계속 흐려진 채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박예환이 말했다. 누나를 만나야 한다고.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돈을 벌고. 그리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누나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사람을 죽인다'는 길로 이어진다는 것이. 사실은 앞에 어떤 이유가 오더라도 죽인다, 는 말과 이어질 수 없어야 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말을 듣더라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안에서는, '죽인다'는 말은 어떤 순간에도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는 어떤 이유도 들어올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답은 간단했다. 누군가가, 그 둘 사이가 이어질 수 있다고 증명해버렸으니까.

 

 

 

 네가 먼저 시작해서, 여기까지.

 

 

 

 ……눈 앞에서 박예환이 울고있다. 누군가가 눈 앞에서 울고 있는 상황이 현재진행형일 때, 그 순간이 믿을 수 없이 끔찍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지만, 그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늘어놓은 말들이 가슴 안쪽부터 천천히 쌓이는 것 같다. 차곡차곡 쌓인 말에 숨이 막힌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과 마주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감정은 언제나 연민이었다. 이런 곳에 온 것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조차 원망하지 못하는 무른 성격도. 아니면 지금까지 버텨오는 데만 온 힘을 쏟아야했던 인생도. 늘 그랬다. 타인을 향한 감상에 담긴 것은 깊은 연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연민도 있었지만, 그 연민의 밑바닥에 공감이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네가 느끼고 있을 막막함과 두려움과 슬픔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근거도 조심성도 없는 오만이 있었다. 차마 말로 꺼내진 못 할 뻔뻔한 생각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가려던 길의 끝에 서 본적이 있다. 둥글게 모인 책상과 영정 사진. 국화꽃. 스물 두 개의 시선이 나를 향하던 순간. 갑자기 안나예가 와서, 그래서…… 그 다음에 하려다가 삼켰던,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해 덧붙이려고 했던 수많은 이유들. 그 이유를, 눈 앞에 있는 그가 대신 말해준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우스운 꼴이다. 연민의 밑에 깔린 공감은 자기연민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건 조금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했던 생각을 박예환이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습관처럼 모자챙을 잡고 아래로 잡아내렸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 

 "……박예환."


 이름을 불러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지 못했다, 고 하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문진을 들고 있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감정을 추스리기 힘든 것처럼 그의 숨이 떨린다.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오늘 본 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의 모습을 보고, 어쩌면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그가 조금 움직였다. 손을 들어서 눈가를 문지르다가, 힘겹게 입을 연다.


 "그냥 들어갔다가… 내일 내가 뽑혀서 손까지 망가지면… 어떡하라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비통하게 들렸다. 그 말에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붓이 들려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다음에는, 그 손이 사라지는 걸 잠깐 상상하고 말았다. 너무 쉽게 잘려나가버린 윤지아의 왼손을 멀쩡한 그의 손 위에 겹쳐본다. 초고교급이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은 천재 동양 화가의 손. 책임져야 할 모든 것들은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의지하고 있던 재능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면. 그건 얼마나 끔찍한 기분일까. 저 자리에 선 게 나라면 견딜 수 있었을까.

 

 잠시 상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결과적으로, 그 끔찍한 동기의 대상에서 나는 제외되었다.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그의 절박함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듯이, 죽은 자도 산 자의 눈 앞에 있는 공포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 자신의 모습을 끼워맞추며 어설픈 이입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늘은 너무 늦었어."


 그래서 겨우 꺼낸 말은 그게 다였다. 늦었다는 건 시간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고른 말은 달랐지만, 넌 이미 실패했다고 말한 거나 다름 없었다. 그는 이쪽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문진을 향한다. 화를 낼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침묵 뒤에 돌아온 것은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었다.

 

"…그래. 역시 그런 거 같아."
 "……."
 "이런… 이런 거 저지르려면 첫 날에 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 못하겠어. 힘 없는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잠깐동안, 그랬다면 지금 너랑 내 위치가 반대가 됐을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죽고나서 오랜만에 그와 다시 대화했던 날을 기억한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살인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기 주저하고 있는 그였다. 그러니까 분명 그는 처음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복잡한 기분과 함께 마음이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나와 너는 다르다, 하고 마음 속에 못을 박았다. 못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공감은 천천히 빠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곧 연민만 남겠지. 나와 네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라는 말 안에 묶어보려고 하는 것도, 사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안 들어갈 거면 잠깐 이야기라도 할까."

 

 다른 애들이 올지도 모르니까, 어디 들어가서. 그렇게 말하자 그는 잠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들어간 곳은 양호실이었다. 생각나는 가까운 장소 중에 가장 무난한 곳이었다. 적당히 앉을 곳도 있고 사람이 올 일도 아마 없다. 물론 제대로 이야기를 한다면 좀 더 나은 장소가 있었겠지만. 지금 시간엔 식당은 이미 닫혔고, 라운지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것도 꺼려졌다. 

 

 "……."

 

 박예환이 양호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유령은 앉을 필요가 없었지만, 혼자 서있기도 어색할 것 같아 옆에 있던 간의 의자에 앉았다.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다. 양호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울적함이 조금씩 어색함으로 바뀌어 갈 때쯤, 먼저 입을 열었다.


 "……울 건 다 울었어?"

 

 솔직히 유치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어이 없다는 듯 박예환이 표정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운 적 없거든."
 "……."


 다행히, 질문이나 대답이나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래. 그것도 비밀로 해둘게."

 "비밀은 무슨. 안 울었다니까. 헛소리 하지 마라."

 

 잠긴 목소리로 대꾸한 그는 억지로 헛기침을 해가며 목을 풀었다. 그런다고 운 티가 안 나는 건 아니었지만. 본인은 나름대로 진지해보여 그냥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가 앉은 침대 위,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까 그가 떨어뜨렸던 문진이 있었다. 아마 한동안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의 여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까…… 네가 했던 말 중에. 정정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 말에 그가 멈칫한다. 아까, 라는 말에 그의 안색이 확연하게 안 좋아졌다. 다른 곳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려야 할지 주저하는 게 보인다. 조금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뭔가 말하려는 듯 그가 한참 말을 골랐다. 야, 아까 내가 했던 말은… 그러니까. 그 다음에 올 말을 필사적으로 찾는 것 같다가, 결국에는 어떤 말이 돌아와도 받아들이기로 각오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문다. 창백하게 질린 옆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무엇을 신경쓰고 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너 때문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는 한 번도 내 눈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박예환을 포함해서, 여기 있는 아이들은 너무 마음이 약하다. 그건 사실 아주 옛날부터 들어야 했던 말이었다. 모두 사실이었고,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 스스로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던 말이기도 했다. 줄곧 누군가 그 말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니까, 정정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나처럼 멍청하게 쓸 데 없는 증거 안 남길 거라는 말."

 "……뭐야, 너. 설마 그 와중에 멍청하다고 해서 화났냐? 그보다 더한 말도……."
 "그게 아니라."
 "그럼 뭐."
 "네가 나보다 훨씬 어설펐을 거라는 말이었어."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이게 진짜."

 

 얼굴을 한껏 찌푸린 그가 이쪽을 노려본다. 아무래도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즉각 돌아오는 반응에 피식 웃자 그의 표정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웃어? 좋냐? 네가 더 잘할 것 같으니까. 웃기는 자식이네 이거."

 "아니, 그냥."

 

 떨어뜨려서 다행이라고. 아주 작게 말하자 못 들었는지,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라는 거야, 들리게 말을 해. 박예환이 불평했고,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불평을 흘려보냈다. 그 후로는 쓸 데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끝없는 말로 조금 전까지의 일을 덮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쭉 계속되었다.

 

 

 

 


 

*




 


 "조금만 있으면 7시가 되겠는데."
 "뭐? 미친. 여기 시간 가는 거 진짜 이상하다니까."
 "이제 슬슬 들어가는 게 어때. 곧 나도 안 보이게 될 텐데."


 그 말에 그는 잠시 이쪽을 봤다가, 시선을 돌려 옆에 놓아두었던 문진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문진은 깨끗하다. 피가 묻지도 않았고, 닦아내야 할 것도 없었다. 그게 오늘 새벽의 결론이었다.


 "그…… 래."

 "……." 

 "들어가야지. 이제 와서, 어쩌겠어."

 

 그렇게 말하며 박예환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은 여전히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같이 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같은 말은 소용 없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분명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박예환이 되었든, 다른 사람이 되었든. 그러나 이미 기회를 놓친 사람에게는 이제 기다리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개인실까지 배웅이라도 해줄까."
 "됐거든. 징그럽게."


 넌 지금 안 가냐. 나는 조금 있다가 가려고. 대답을 들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보이는 얼굴이었다. 들어가면 잘 수 있으려나. 아마 힘들겠지. 반대로 피곤해서 금방 잠들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의 뒷모습을 보고있다가 문득, 


 "박예환."
 "응?"

 

 

 이름을 부르자 그가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잠깐동안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시 다물었다.

 

 

 "……가서 잘 쉬어."
 "어. ……너도 그, 쉬어라."



 가벼운 인사 뒤에 박예환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문을 열고 양호실을 나섰다. 문을 닫다 말고, 다시 한 번 이쪽을 힐끔 본다. 잘 가.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는 멈칫했다가 작게 끄덕였다. 마침내 문이 닫혔다. 시계를 보자 6시 50분을 조금 넘어간 시각이었다. 조용했던 새벽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


 


 


 


……
………


 



 

 사람을 죽이기로 했다.


 




 그렇게 다짐했던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성공했다. 너와는 다르게. 우연히 그곳에 나와있었을 뿐인 죄 없는 여자애 하나를 죽였다. 그 때 그 결과가 눈 앞에 있었다. 느껴질 리 없는 한기가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다. 지금은 굳게 닫힌 냉장고의 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다. 싸늘한 냉장고의 좁은 칸에 들어있는 것. 까맣게 타버린,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 무언가. 죽었다, 는 말의 본질은 이 안에 있다. 유령 같은 건 있어선 안 될 찌꺼기일 뿐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죽은 사람의 모습은 이게 전부다. 억지로 포장해서도 잊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 날 네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결국 할 수 없었지만.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고 싶었다.

 

 

 

 

 

 너는 이렇게 되지 마.

 

 

 

 

 

 

 

 

 

 

 

- - - - - - - - - - - - -

맨 앞 대화는 새벽에 둘이 마주치기 전 오후쯤?에 예환이 자유행동에서 했던 대화에요!

마지막 부분은 생물실 처음 열린 날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

이쪽으로 오지마 예환아…… 예환이… 왜 죽었냐 진짜…… 내 단로리 최애들 다 죽는다……………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ㅅ....생....  (0) 2015.08.29
.  (0) 2015.08.28
인간쓰레기  (0) 2015.07.26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0) 2015.03.14
Posted by
,

 

 

 

 

 유스호스텔에서, 무대에 올라섰던 여학생이 쓰러졌을 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희망봉 학원의 요원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요원을 다그치거나 여학생을 걱정하는 동안, 그저 조용히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구급차가 도착하고 여학생이 실려나갔다. 그리고… 방송이 울렸다. 이 모든 상황은 연출된 것이었고, 입학 시험의 일부였다, 하고.

 

 누군가 화를 냈고 누군가는 겁에 질렸다. 또 누군가는, 여학생이 정말로 다친 게 아닌가 의심하고 걱정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아무리 유명하고 까다로운 학교라고 해도, 그런 시험을 보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저 한 가지 생각만이 그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감점, 당했으면 어쩌지.

 

 

 

 ……나중에,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문득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우리 가족은 나를 걸고 도박을 했다. 희망봉 학원 한국 분교의 입학과 졸업이 목표였고, 보상은 그 뒤에 따라올 성공이었다. 넉넉치 않은 살림에 학원비에 돈을 쏟아붓고 빚까지 끌어다썼다. 멍청한 짓이라고 비난받을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충분히 죽은 듯이 살았다. 기적 같은 성공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계속 내리막길을 달릴 거란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얌전히 학원에 다녔다. 열아홉살이 되도록 스카우트를 받지 못하고, 집에 남은 빚이 얼마인지 들었을 때, 여기서 실패하면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는 순간 모든 걸 체념하고 내게서 고개를 돌리는 가족들을 상상했다. …… 그러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버린 패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비록, 이런. 학원이 학생들을 감금하는 이상한 상황이라도. 사실은 희망봉 학원에 입학했다는 사실 자체가 면죄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노력했고 그 결과 이곳에 입학했다. 내가 할 일은 다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저 가만히, 구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이다.

 

 

ㅡ 너네가 "초고교급 학생으로 시험에 통과한 합격자라는 이야기"…… 그건 어떻게 믿는 건데?

 

 

 

 ……그러나 만약에라도 내가 초고교급이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아무 노력도 없이 보냈던 시간을 과연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뭘 위해 여기에 왔는지 깨달았다. 친구를 사귀기 위함도, 요리를 하고 매일 멍하니 지내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입학과 졸업을 마치고 가족들에게 다른 삶을 안겨주는 것. 그것만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의미였다.

 

 고기를 먹기 위한 젓가락을 챙기면서, 작은 식칼 하나를 챙겨 파우치에 넣었다. 자세한 계획까지는 생각해낼 수 없었다. 이 중에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못 하더라도 언젠가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벽에 준비실에 왔다. 일단은 칼을 숨겨놓기로 했다. 그러면 졸업하기 위해 조금은 노력한 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나는 소품 박스 깊숙히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때.

 


 

 "……우진……."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

 

 

 

 


 "아, 안녕하세요? …"


 준비실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언제 왔어?"

 "아, 아까… …안 주무세요…?


 아까, 같은 말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잠이 안 와서. 그러는 너는……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뭘… 잊어버려서 찾으려고…. …무용실에서 두석한테도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하셔서…"

 "…떨어뜨린 거야? ……뭔진 몰라도, 이 주변에서 특별한 건 못 봤는데."

 "아, 그… 그래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찾아볼게요…."


 잃어버린 물건 같은 건 찾지 말고 방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뭔지 말해주면… 같이 찾아볼 수는 있는데."


 내 시선이, 야구 방망이를 향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다.

 


 

 "앗, 그래주신다면… 가… 감사해요. 저어… 그게 그… 칼인데…… 작은 커터칼이요."

 "커터칼…? ……그래. 그럼 난 이쪽을 찾아볼게. 그쪽에 있나… 한 번 찾아봐."

 "네에… 정말 감사해요……."


 

 ……거기서 나를 믿고, 뒤를 돌지 말았어야 했다.




 조용히 야구 방망이를 잡으면서 생각했다. 운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한 밤 중에, 살인을 하려고 다짐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 혼자서 찾아오다니.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아까 왔다면, 어쩌면 칼을 숨기는 걸 봤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말하기라도 하면… 모든 기회가 사라진다. ……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예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여리고… 착한 사람.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나는, 내가 초고교급이라는 걸, 졸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가족들에게. 희망봉 학원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증명할 것이다.

 




 나는 있는 힘껏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 ……."

 "……."

 "아…… 아아…… 아? ……."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기절조차 하지 않았다. 놓친 방망이가 바닥을 굴렀다. 나는… 숨을 골랐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 앞에 안나예가 쓰러져있다. 안나예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로 간신히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나를 보는데. 그게… 그게 모두 현재진행형이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안나예가, 울면서…… 말했다.


 "미… 안해요, 잘못했어요……."

 "……."

 "때리지 마세요……."

 "…………."


 차라리 누군가 나를 칼로 찔러줬으면.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줬으면. 그러나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나는 이대로 안나예를 죽이게 될 것이다. 잠시동안 아주 많은 변명을 생각해냈다. 나는 여기서 나가야 된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가 없으면 못 사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진짜 초고교급이라는 걸 증명해낼 때까지, 나도 우리 가족도, 죽어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그녀가 우는 걸 보고 있는 사이에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미… …늦었잖아."


 그것뿐. 늘 그랬듯,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떨었다. 떨었지만, 도망치지도 못했다. 불쌍한 안나예. 그냥 운이 안 좋았을 뿐인, 불쌍한 여자애. 목도리를 잡는다. 그녀가 짠 목도리는, 부드럽고, 푹신하고, 따뜻했고, 나는, 그걸, 아주 세게








*





......

.........





 그렇게.

 안나예가 죽었다.




 나는 그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앞에 죽은 안나예가 있다… …머리가 멍해서, 이게 현실인가, 하고 잠깐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서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렀다. 그리고 아무리 오랫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더라도, 영원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ㅡ나중에 너한테 요리 배우거나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

 ㅡ…내일도 괜찮아요~ …내일 같이 할래요?

 ㅡ……정말로?



 안나예가 죽었다. 죽었다… 그 말이 계속, 나레이션처럼, 눈 앞에 있는 걸 똑바로 보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되풀이된다. 그러나 그 말을 곱씹을수록 머리는 더 멍해져갔다.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죽었다는 말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죽었다는 게, 대체 뭘까.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훨씬 더 길고 끝나지 않는 문장이어야 한다. 한 사람이 더 이상 숨을 안 쉬고 말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그게 앞으로도 쭉 계속되는… 그런… 그런 상황을, 단어 하나로 정리해버릴 수는 없는 거였다.



ㅡ……응… 네가 괜찮다면. ……부탁할게.

ㅡ…내일 같이 하기 약속?

ㅡ…응. 약속. 내일 꼭 가르쳐 줘.



 앞으로도 쭉 계속되는……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명치부터 심장까지가 푹 꺼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녀와 같이 만들었던 요리는, 첫 번째가 카레. 두 번째가 볶음밥. 그리고 세 번째가 국수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에서 끝났다. 안나예와 같이 요리를 한 건 단 두 번이었고, 이제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ㅡ잘 자. 내일 보자. ……약속 잊지 말고.

 ㅡ…우진이야말로 약속 잊으면 안 돼요? …내일 봐요….



 

 나는 나예가 했던 인사를 떠올렸고.

 ……그 순간 도저히 그녀를 더 볼 수가 없어서, 모자를 깊게 눌렀다.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 2015.08.28
[관록] 통행금지  (2) 2015.08.22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zZ (150120)  (0) 2015.03.14
Posted by
,

 

 

 '……그 땐 그런 바람이라도 가질 수 있었는데.'



 이제 잠들 수도 없게 되어버렸네.

 잠이 없는 새벽은 무자비하게도 길었다. 졸음이나 배고픔 같은 감각은 없다고 해도, 지금껏 당연하게 해오던 것들을 할 수 없게 되는 건 생각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아야마루는 천천히 걸었다. 1구역부터 마지막으로 열린 5구역까지, 아주 오랫동안.

 모든 게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타임 리밋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때가 되면 이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날 것이다. 해피 엔딩은 없겠지만 베스트 엔딩은 있길 바랐다. 앞으로 나아갈 힘이 남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이곳에 남겨지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게 되겠지. 너나, 나 역시도.

 아야마루는 계속 걸었다. 앞으로, 계속해서. 결국에는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걸었다.




*



 그러다 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창고 앞이었다.


 언젠가 한 번 조사했던 곳. 그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지금은...... 글쎄. 한 두 마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문에 손을 대고 힘을 싣자 그대로 손이 문을 통과했다. 유령처럼 스르륵 창고 안으로 스며든다. 홀로그램인데도 서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듯한 창고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다. 그 어둠이 낯설다가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네가 여기서 죽었구나. 이런 추운 곳에서.


 '바보 같이.'

 피해자는 스즈키 타로와 카미시로 아야마루, 사인은 두 사람 모두 자살. 다시 생각해봐도 우스운 결말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엇갈린 자살이라니. 우리는 그런 비극 같은 건 원하지 않았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다시 생각했을 땐 우습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이제는 그저 허무하고 화가 났다. 그런 선택을 한 친구에게도, 우리를 마지막까지 가만히 두지 않는 신에게도.

 '나는 죽어도…… 너는 죽으면 안되는 거였어.'

 이제야 정답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타로 곁을 떠날 각오도, 목숨을 버릴 각오도. 가질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모든 게 그의 죽음과 함께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네가 죽어선 안 됐어. 네 인생은, 이런 데서 끝나면 안 되는 거였어. 난 아직 너한테 사과도 못했는데 벌써 죽으면 어떡해. 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 그거 하나만 바라고 있었는데.

 '속죄를 해야되는 건 언제나 나였는데.'


 알아? 타로.

 처음부터 네 인생을 망친 건 나였어. 너한테서 가족을 빼앗은 것도. 널 비난 속으로 몰아넣은 것도. 네가 네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믿게 된 것도 전부. 모든 게 내 잘못이었어. 너는 아무 잘못도 없었어.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야. 하필이면 나랑 친해진 게, 네 불행이었어.



 '너한테 직접 말하고, 사과해야 되는데.'

 끝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하고 싶었던 말들은 하나도 전하지 못했다. 각오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역시 너한테 미움 받는 건 좀 무서운가봐.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아진 게 없구나, 나는. 

 '……미안해, 타로.'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모든 것이 바보 같았다. 허무했고, 슬펐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두 사람은 죽었다. 가능성은 끝이 났다. 어렸을 때 잠들기 전에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다시 텅 빈 마음 속을 가득 채웠다.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헛된 바람들이 끝도 없이 흘러나와 고통스러웠다. 이루어질 수 없다면 차라리 모든 걸 놓고 잠들고 싶었다. 이제 그만…… 쉬고 싶었다.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록] 통행금지  (2) 2015.08.22
인간쓰레기  (0) 2015.07.26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zZ (150120)  (0) 2015.03.14
[ㅇㅇㅁㄹ] 자유행동  (0) 2015.03.04
Posted by
,

 

 

 

 남자는 우비를 입고 있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남자의 우비는 흠뻑 젖어있었다. 기분 나쁘고 축축한 색. 손에는 무언가 묵직해보이는 둔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바닥에 쓰러진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ㅡ……왜…… ……짓을……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무언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말을 하고있었다. 그 사실이 왠지 현실감이 없어서, 아야마루는 그저 망연히 그 장면을 보고만 있었다.

 ㅡ그건 네 이름이…… ……라서.

 우비를 입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 대답에, 갑작스레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쿵, 하고 심장이 묵직하게 뛰었다. 그 다음에는 쿵, 쿵, 쿵, 쿵... 조금씩 박동이 빨라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아야마루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의 집에 놀러갔을 때, 그를 보면서,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하고 유난히 여러번 물어보던 사람.



 타로의 아버지.




 ……타로의 아버지가 우비를 입고 서있다. 비도 오지 않는데, 우비는 흠뻑 젖어있다. 까맣게도 빨갛게도 보이는 이상한 색. 그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한다. 

ㅡ…… …… ……


 주문이라도 읊듯이, 그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아무 의미 없는 소리 같기도 했고, 사람의 이름을 쭉 이어놓은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들어도, 계속 귀를 기울여 봐도. 익숙한 목소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야마루는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멀어지다가 마침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정신 없이 뛰기 시작했다.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그래도 상관 없었다. 어디로든 좋으니 멀리 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심장이 터져버리는 것 아닐까 싶을만큼 뛰었다. 목도 머리도 다리도 아팠다. 한참을 달리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의 발걸음을 조금씩 느려지게 했다.


 신고, 해야할까.


 방금 본 게 어떤 상황이든간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사람이 위급한 상태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건이든 사고든 누군가에게 알려야 했다. 경찰에게 연락하는 게 가장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타로의 아버지라면,'

 타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머니와 둘이 남겨지는 걸까. 아버지가 없는 생활이 견디지 못할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있던 존재가 없어지는 건 무게가 다르겠지. 슬퍼할까.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내가 타로한테서 아버지를 빼앗는 게 된다면, 그건 싫은데. 하지만…… 만약 정말로 살인마라면. 타로도 위험한 게 아닐까.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또다른 생각이 나타나 그것을 집어삼켰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어졌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응, 만약 잘못 본 거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야.

 아야마루는 잠시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쥐었다. 그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




 ……눈을 떴을 때는 아직 한 밤중이었다.

 잠에서 깬 아야마루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우비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피 냄새가 방 안에 남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식은 땀이 기분 나쁘게 이마에 맺혀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생생하고 불쾌한 꿈이었다. 충전기에 꽂아놓은 채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새벽 두시 반. 부재중전화도, 메일도 없음.

 그 날로부터 이미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타로를 만나지 못한지는, 일주일이 지났다. 타로는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자주 함께 놀던 놀이터에서도, 편의점에서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통화 버튼을 누른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현실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타로의 아버지는 정말로 '나쁜 사람'이었다. 슬픈 일이었지만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타로의 어머니까지 나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든 것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신문과 뉴스는 매일 일본의 보니 앤 클라이드에 대해 보도했다. 죄책감 한 점 보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그들을 향해 시도 때도 없이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쏟아지고 남은 화살은…… 모두, 타로를 향했다.

 범죄자 부부의 어린 아들. 남겨진 유일한 사람. 이 아이는 커서 어떻게 될까? 부모처럼 되는 게 아닐까? 부모의 피를 물려받았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아이를 제대로 키워왔을 리 없으니까. 범죄자는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가 될 피를 가지고 태어나는 거라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타로를 예비 범죄자 취급해왔다. 견디다 못 한 타로는 모습을 감췄다.



"……."


 아야마루는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화면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자판을 꾹꾹 누르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메일 한 통을 보내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수신자는 스즈키 타로. '새벽에 갑자기 미안. 자다 깼는데 생각 나서 보내. 악몽 꾸지 말고 잘 자.' 라는 내용이었다.

 답장은 당연하지만 오지 않았다. 새벽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아야마루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올 거라고 믿고있었다. 믿고 싶었다.

 '나쁜 일이 일어난 건…… 아닐 테니까.'

 뻔뻔하게 계속 연락을 할 수 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타로가, 안 좋은 선택을 했을까봐.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고, 그것만이라도. 무사하다는 것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메일을 보내다보면, 질려서라도 타로가 한 번쯤은 답해주지 않을까. 그러면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이제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해도 좋으니까, 딱 한 번만.


 아야마루는 핸드폰을 다시 머리맡에 놓았다. 연락이 오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도록 소리도 진동도 최대로 해놓은 채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게, 잘못된 선택도, 목격했던 것도, 전부 다 없던 일이 된다면. 다시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함께 놀던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로,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헛된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잠이 들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쓰레기  (0) 2015.07.26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zZ (150120)  (0) 2015.03.14
[ㅇㅇㅁㄹ] 자유행동  (0) 2015.03.04
[ㅇㅇㅁㄹ] 사망로그 (150124)  (0) 2015.03.04
Posted by
,
시야에 비치는 세상이 낮았다. 내려다본 손도 평소보다 한참 작았다. 고개를 들자 우비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비도 오지 않는데 우비는 무언가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내가 아니라, 바닥에 쓰러져있는 누군가에게.


아, 다시 이 날로 돌아왔구나.


열 세살이 된 카미시로가 조용히 생각했다. 이미 여러번 본 꿈이었다. ......처음에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날 하루를 전부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수많은 밤을 이 날의 꿈에 시달려야 했고, 어느 날은 내가, 어느 날은 타로가, 어느 날은 어머니가, 동생이, 선생님이, 또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우비를 입은 채 눈 앞에 나타났다. 잊길 바랄수록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지다가, 마침내 인생의 한 가운데에 박힌 채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식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핸드폰이 있었다. 꺼내들고 손에 쥐었다. 모든 것이 생생하다. 어떤 숫자를 눌러야하는지도, 알고 있다. 천천히 기억 속의 숫자를 누른다. 1, 1, 그리고...... 0.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놓은 채 가만히 있었다. 어느 샌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화면 위에 떠오른 숫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소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린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 열 한 번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남자가 손을 뻗었다.
......마지막까지 통화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




"......"


눈을 뜨자 천장이 보인다. 불은 켜진 채였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핸드폰 대신 라이터가 잡혔다. 이미 핸드폰은 빼앗긴 후다. 시간은 흘렀고, 타임머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가는 그런 꿈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 꿈에서 벗어나지 못 한 채였다. 방의 조명 빛 사이로 우비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당신을 원망하고 싶었는데.'

그 문장은 거기서 끝이 났다. 원망하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날과 당신은 이미 내 삶의 일부고,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줬으니까.

당신이 가르쳐준 것들. 예를 들면 삶은 아무 이유 없이, 어느날 갑자기, 순식간에 비참해질 수 있다는 것. 불행의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그만큼 더 허무해질 뿐이라는 것. 신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아니, 오히려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가장 좋은 타이밍을 찾고있다는 것. 불행은 가지고 있던 행복의 제곱만큼 찾아오니까, 늘 0인 채로 살면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버텨왔으니까요.'

카미시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고, 속이 메슥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의 삶은 0이었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고통도 슬픔도 없었고, 내일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믿었다. 가끔, 타로와 시시한 장난을 칠 때나, 누군가와 함께 나가자는 이야기를 할 때. 그리고 새로운 약속들을 할 때마다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곤 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알고 있지만. 이제 와서 바뀌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그 대신 그는 메모장을 펼쳤다. 그리고 차례 차례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사해야 할 것. 비밀번호. 창고. 절망병을 고치는 방법...... 지키기로 했던, 약속들. 그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어쨌든 그는 살아있었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카미시로는 적은 메모를 다시 읽고 메모장을 덮었다. 오전 세 시가 조금 넘은 새벽.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자유행동  (0) 2015.03.04
[ㅇㅇㅁㄹ] 사망로그 (150124)  (0) 2015.03.04
[ㅇㅇㅁㄹ] ㄴㅇ님 빵빵빵  (0) 2015.03.01
Posted by
,

1
아. ㅇㅇ씨... 맞죠? 좋은 낮이에요.
인사는 잠깐씩 했지만... 이렇게 단 둘이서 대화하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거기다 이 섬으로 옮겨오고 나서는, 정신 없어서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으니까. 거기부터 다시 할까요?
대리사과원으로 입학하게 된 카미시로 아야마루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ㅇㅇ씨.

...........
...하하. 대리 사과... 라니 생소하죠?
보통은 해결사라던가, 그런 분들께서 부업으로 하시는 모양이던데.

일단은, 말 그대로 사과를 대신 해주는 사람이에요.
다만 대신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다 하는 건 아니고... 옆에서 보호자 역할로 돕거나, 함께 사과할 내용을 생각하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아예 대신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보통은 그런 보조적인 역할이에요.

음... 그 밖에는 반성문이나 사과문 쓰는 것도 돕고 있고. 그런 글에서 쓰기 좋은 공손한 표현이라던가,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 선에서 자기 사정을 설명하는 법이라던가... 주로 그런 것들을 가르쳐 드려요.
이것도, 제가 아예 대신 써드릴 수도 있지만... ...하하. 금액이 비싸지니까 추천 드리진 않아요.

아, 혹시라도 원하신다면 고해성사도 도울 수 있어요. 신께 드리는 사죄도 취급하고 있거든요.
아하하. 반은 농담, 반은 진담이에요. 제 사과가 거기까지 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결국 제 역할은... 사과 자체보다도, 의뢰하신 분이 안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되겠네요.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용서 받기 전까지 계속 불안해야 하니까. 혼자 그 불안을 짊어지기 보다는, 그래도 옆에서 같이 상의할 사람 한 명 정도는 있는 게 나을 테니까요.
제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쁠 거에요.

하하. 그러니까 ㅇㅇ씨도 뭔가 사과하실 일이 생기시면 말씀해주세요.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하나보단 둘이 나을지도 모르니까.
혼자 걱정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자유행동 종료]





2
(식당)

어라.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ㅇㅇ씨.

아. 저는... 잠이 안 와서. 잠깐 차라도 마실 생각이었거든요.
...하하, ㅇㅇ씨도 비슷한 상황이신 모양이네요.
괜찮으시다면 거기 앉으세요. ㅇㅇ씨 몫도 한 잔 타올게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1. 커피
2. 코코아
3. 녹차

1)
이 시간에 커피로 괜찮으시겠어요? 아침까지 못 주무실지도 몰라요.
음, 카페인이 잘 안 듣는 편이시라던가... 그런 거라면 괜찮겠지만.
설탕이랑 우유, 얼만큼 넣을지 말씀해주시면 그대로 타올게요.

2)
......아하하. 추운 밤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네요.
따뜻하고 진하게 끓여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위에 띄울 마시멜로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어디 없으려나...

3)
아. 녹차 좋아하시나요? 저도에요.
마시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고 해야하나.
응, 저도 녹차로 할 생각이었어요. 금방 준비할게요.


...자, 여기.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
............

응, 이러고 있으니... 편하네요.

전 차 한 잔 두고 앉아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거기에 이렇게 같이 이야기해주실 분이 계시면, 더 기쁘고.
여기 오기 전까지는 자주 그런 시간을 가졌는데...

하하, 생각해보니 사과 다음으로 많이 한 게 차 끓이는 일이었던 것 같네요. 누군가 찾아오시면 꼭 차를 내드리는 게 습관이거든요.
따뜻한 차 한 잔 만큼,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도 많지 않으니까.

각자 차 한 잔씩 들고, 이런 식으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거에요.
의뢰일 때도 있고, 그냥 잡담일 때도 있고... 누구든 좋으니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오시는 분들도 계시니까, 그런 분들 이야기도 듣고.

그게 저한테는 가장 즐거운 일이었어요. 아, 타로랑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지만.
전부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인생들이니까. 신기하다고 해야할까요, 음... 설명하기는 복잡하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ㅇㅇ씨랑 있을 때는 왠지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기분이네요.
하하, ㅇㅇ씨가 열심히 잘 들어주셔서 그런가봐요.
고마워요.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네요.

자, 그럼 제 쪽 이야기는 끝났으니까... 이제 ㅇㅇ씨 이야기를 들어봐도 될까요?
어떤 이야기라도 좋아요. 즐거운 이야기도, 즐겁지 않은 이야기라도.
ㅇㅇ씨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이미 기쁜 일이니까요.


[자유행동 종료]





3

음......
...섬을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동물 같은 건 보이지 않네요.
정말로 우리들 뿐인 모양이에요. 아직 막힌 곳들도 있으니, 그쪽에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아쉬운걸요. 이 큰 섬에 저희 밖에 없다니, 이상한 기분도 들고...
길고양이 한 마리라도 있었다면 삭막한 느낌이 좀 덜했을 텐데.

아, 그러고보니 ㅇㅇ씨는 고양이 좋아하시나요?
저는 제법 좋아하는 편이에요. 옛날에 한 번 키운 적이 있는데... 아마 그 때 기억 덕분인 것 같네요.
...그 때 이야기 말인가요? 음......

어렸을 때... 아직 초등학생이었을 때, 타로랑 고양이를 키웠어요.
누가 버리고 간 까만 고양이였는데. 둘 다 집에서는 키울 수가 없어서, 밖에서 숨기고 키웠죠.
매일 수업이 끝나면 같이 가서 밥도 챙겨주고, 놀아주기도 하고...

이름은 고쿠로였어요. ...이상한 이름이죠?
저희가 붙인 이름을 반반씩 섞었거든요. 타로는 고지라, 저는 쿠로.
검은 색이니까 쿠로라니, 그럼 넌 파란 색이니까 아오마루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타로한테 한참 놀림 받았었는데. 음...
글쎄요... 까맣고 크니까 고지라, 라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는데. 하하.

어쨌든, 고쿠로는 저희를 잘 따랐어요.
버려진 경험이 있다면 다시 사람을 따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래도 저희 둘은 마음에 들었나봐요.
...쓰다듬으면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았어요. 저희를 믿고있다는 증거 같아서.

아... 마지막까지 키우진 못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거든요. 어쩌면 이제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
그 날 좀 더 빨리 찾아가 봤어야 했는데. 타로에게나, 고쿠로에게나... 미안해요. 많이.
...하하, 이제 와서 후회해 봐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에요.

응. 고쿠로와 헤어질 땐 슬펐지만, 그래도... 여기서 나가면 또 동물을 키워보고 싶네요.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고, 마지막까지 책임 지고 돌볼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떤 걸 키우는 게 좋을지는 아직 고민 중이지만...
다시 고양이를 키워도 좋고, 강아지라던가... 다른 동물들도 키우기 즐거울 것 같아요.

아, ㅇㅇ씨 의견도 들어보고 싶은 걸요. 어떤 동물이 좋을까요?
1. 강아지
2. 고양이
3. 부엉이

1)
하하. ㅇㅇ씨는 고양이보다는 개를 좋아하시나 보네요.
응, 저도 고쿠로를 키우기 전까지는 강아지가 더 좋았어요. 주인한테 늘 의지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하나...
키운다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형견이 키우고 싶네요. 같이 산책하러 나가면 즐거울 것 같아서 좋아요.

2)
고양이를 한 번 더 키워볼까요? 저번처럼 까만 고양이를 다시 키워보고 싶기도 해요.
...아니, 그렇게 되면 분명 고쿠로를 겹쳐보게 되겠네요. 그건 새로운 고양이나 고쿠로, 양쪽 모두에게 실례일지도...
그래도 고양이는 저한테 제일 친근한 동물이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고마워요.

3)
...아, 이건 좀 예상 밖의 선택인걸요.
아하하. 부엉이라... 그러고보니 옛날에 한 번쯤 만져본 적이 있네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게 귀여웠는데.
응, 키우게 되면 즐거울지도. 꼭 한 번 찾아볼게요.


나간 다음의 이야기는 아직 조금 이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생각하기 즐거워서 좋네요.
나중에 키우게 되면 꼭 연락 드릴 테니까, 자주 놀러와서 보고가세요.
새로운 가족이랑 같이 환영할게요.


[자유행동 종료]




4
(2챕 시작 이후부터 가능)

새로운 구역이... 열렸네요.
...그래도 기뻐하긴 힘들지만요, 하하.

............
ㅇㅇ씨는... 괜찮으신가요?
1. 괜찮다
2. 괜찮지 않다
3. 잘 모르겠다

1)
괜찮으시다면... 다행이지만.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시는 건 아닌 거죠?
응... ㅇㅇ씨의 말을 믿을게요. ...정말이라면, 기뻐요.

2)
...하하... 죄송해요, 우문이었네요.
.........
저번처럼... 따뜻한 차라도 끓여올게요.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거라도 마시면서 조금 쉬세요.

3)
응... ...그렇네요.
저도, 잘 모르겠다는 게 제일... 맞는 표현인 것 같아요.
...괜찮은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그냥... 실감이 잘 안 나네요.


.......
여기 오기 전까지, 한동안... 안심하고 있었어요.
특별히 행복한 일도, 특별히 불행한 일도 없었거든요.

그러다 갑자기 키보가미네 학원에서 초대장이 왔을 때는, 좀 놀라긴 했지만...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의심은 별로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쩌면, 행운이 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랬는데 타로도 같이 입학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한 입학식을 보고... ...새로운 불행이 시작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신은 또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겠구나... 하고.

......

전 처음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과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나뉘어져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노력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는... 신이 정해놓은 역할 같은 게 있다고 말이에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과 부잣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정해져있듯이. 유독 운이 좋은 사람과, 반대로 나쁜 일이 끊임 없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듯이...
주인공과 악역이 나누어져 있듯이, 신이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인생의 흐름이 있어서... 본인이 아무리 바라도 그걸 거스를 순 없다고. 이유 같은 건 없이, 그냥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망하는 것보다 편하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에서도, 불행에 맞서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까, 잘 모르겠네요. 어느 쪽이 더 나은 길인지.

......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저는 행복한 쪽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10년이나 곁에 있어주는 친구도 있고, 이렇게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좋은 분도 만나고.
저보다는... 제 곁에 불행이 많이 찾아오는 것 같아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가끔 좀 슬프네요, 하하.

미안해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ㅇㅇ씨 앞이라서 긴장이 풀어졌나봐요.
...잠깐 산책이라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올게요.
ㅇㅇ씨도... 무리하지 말고 푹 쉬세요.


[자유행동 종료]





5
(4챕 절망병 발병 이후)

.........
........아, ㅇㅇ씨.

......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미안해요. 잠깐만... 방으로 와주시면 안 될까요?

(개인실로 이동)



여기가 제 방이에요. 별 건 없지만...
잠시만 거기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
..............
..................

......다 됐다.
짠. 선물이에요.

(아야마루는 정교하게 접은 종이꽃 하나를 내밀었다.)


...하하. 괜찮은가요? 오랜만에 접어 본 거라 자신은 없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그동안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에 대한 답례에요. 고작 이런 거라 죄송하지만... 아까 심각한 척했던 건 깜짝 놀래키고 싶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저번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한참 생각해 봤어요.
...지금까지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설령 제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슬프거나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까... 이대로 가만히 앉아있기에는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거에요.

...저는 타로가... 여기서 살아서 나갔으면 좋겠어요. ㅇㅇ씨나, 다른 분들도. 다들 약속하신 것도 지키고 싶은 것도 많으실 테니까... 한 분이라도 더 무사히 이곳을 나가시길 바라요.

그래서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지금 이렇게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응.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다른 분들을 본받아서 저도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에요. 불행에 맞서면... 이번에야말로 뭔가 바뀔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저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여러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ㅇㅇ씨도 있고, 다른 분들도 다 믿음직스러운 분들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건 제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ㅇㅇ씨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에요. 기회가 되면 꼭 더 좋은 선물로 다시 드릴게요. ...그러니까 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요. 약속.

......

이제... 마지막 한 번이라고 했죠? 정말로 얼마 안 남았네요.
지금까지 버텨내 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저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응, 같이 조금만 더 힘내요. 분명 모든 게 괜찮아질 거에요.

......
하하. 제 특기는 사죄지만, ...역시 여기서 미안하다고 하는 건 너무 눈치 없는 일 같네요.
그러니까, 고마워요. 이곳에 와서 ㅇㅇ씨 같은 친구를 만나게 돼서 다행이에요.

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했어요. 밤이 깊었네요.
피곤하실 텐데, 이제 그만 주무세요. 저도 오늘은 이만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방 앞까지 배웅할게요.


(ㅇㅇ 개인실 앞까지 이동)


오늘 늦은 시간까지 같이 이야기 해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속이 좀 시원해졌어요. 오늘은 분명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옛날에 타로랑 같이 놀던 꿈이라던가, ㅇㅇ씨와 다른 분들과 이야기하는 꿈이라던가...
...아니면, 사실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 가상 현실이었다는 꿈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하하, 저도 모르게 또 떠들고 있었네요. 미안해요.
응... 이제 그만 인사해야죠.

잘 자요, ㅇㅇ씨.
아침까지 깨지 말고, 행복한 꿈만 꾸시길 바라요.

......진심이에요.



[자유행동 종료]
[카미시로 아야마루와의 이야기를 마쳤다.]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zZ (150120)  (0) 2015.03.14
[ㅇㅇㅁㄹ] 사망로그 (150124)  (0) 2015.03.04
[ㅇㅇㅁㄹ] ㄴㅇ님 빵빵빵  (0) 2015.03.01
Posted by
,

 

 이걸로 된 거겠지.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밧줄이 타들어간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아야마루는 몇 번이나 거듭 생각했다. 이게 가장 정답에 가까운 선택이다. 병은 순식간에 두 명에게 전염되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살인이 일어나면 치료제가 지급되고, 자살 역시 엄밀히 말하면 살인이었다. 방에는 유서를 남겨두었다. 설령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도, 자살이라는 것은 금방 밝혀질 것이다. 앞으로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누군가 죽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

 

 사실은 좀 더 빨리 이렇게 해야 했던 건 아닐까. 매 구역마다 두 명씩이나 목숨을 잃을 필요는 없었는데. 좀 더 빨리, '행동할 용기'가 필요했다. 이럴 때를 위해서 내일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살아온 걸 텐데. 의미 있는 삶들이 사라지기 전에, 제일 가벼운 목숨을 써야 했는데. 그랬는데...... 욕심을 부렸다. 세 번의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행동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도, 분명 하나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있는 동안, 약속을 많이 하고 말았다.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앞으로 한 번, 또 누군가가 희생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 하지만... 영화를 본 순간 깨달았다. 이번엔 네 차례구나. 할 수 있다면 지키고 싶었지만, 이번만은 기다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죽고, 길이 열릴 때까지.

 

 아야마루는 천천히 지금까지의 약속들을 되짚었다. 동생의 결혼식에 가겠다는 약속. 같이 음식점을 돌아다니자는 약속. 산책을 하자는 약속. 사과를 전해주겠다는 약속. 같이 살아서 나가자는 수많은 다짐들.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이 고양이를 키우자는 약속도.

 

 '그건 너도 거짓말이었겠지만.'

 

 그 모든 약속이, 저 나이프가 떨어짐과 동시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이건 희생 같은 게 아니었다. 어리석고 제멋대로인 짓이었고, 동시에 무책임한 배신이었다. 용서는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봐, 타로.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였어.

 

 

 '……슬퍼해주려나.'

 

 

 매듭이 풀렸다.

 그래도 너만은, 마지막까지.

 

 

 

 

*

 

 

 

 

ㅡ검은색이니까……

ㅡ쿠로라고 하자.

ㅡ고지라 하자!

ㅡ…고지라라니, 뭔가 때려 부술 것 같은 이름이네.

ㅡ…쿠로는 너무 평범하잖아… 그럼 넌 아오마루 할래?

 

 

 

 내가 쿠로, 네가 고지라라고 지어서 고양이의 이름은 결국 고쿠로가 되었었는데. 어른들 몰래 매일 찾아가 돌보던 고양이는 그 때의 우리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비록 결국에는 들켜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 고양이를 찾아갔다.

 

 어느 날 찾아갔을 때 고양이는 죽어있었다.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고, 추위에 얼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난도질해놓은 것이었다.

 

 타로가 오기 전에 급히 고양이를 숨겼다. 타로에게는 고양이가 사라졌다고, 아마 독립한 게 아닐까 하고 거짓말을 했다. 타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럼 어쩔 수 없지'하고 말했다. 그 날 우리는 고양이를 찾지 않았다. 분명 타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양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죽기 전에 문득 그 때가 떠올랐다. 우리가 함께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 어쩌면 그건, 우리 둘은 같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늘이 내린 경고 같은 게 아니었을까. 앞으로 다가올 모든 불행들에 대한 예고였던 건 아닐까.

 

 꿈에서 깨고나니 주변은 조용했다. 수술대 위에 그는 혼자였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추위가 온 몸으로 스며들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모든 감각이 희미해진다. ......아. 혼자 죽는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이었구나. 아야마루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왼손의 코인을 꽉 쥐었다.

 

 

 '……타로.'

 

 

 네가 있어서 나는.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나는 계속 너한테 의지하고 있었어. 너는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한테 그런 건 정말로 상관 없었어. 너는……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모든 이유는 다 핑계였다. 영화를 봤을 때, 그리고 그게 네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을 때. 안그래도 점점 지쳐가던 네가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끔찍한 처형들이 떠올랐고, 조바심이 났다. 나는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타로. 그건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슬픈 일이니까. 견딜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이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거야.

 

 '미안…….'

 

 다시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이제 두 번 다시 눈이 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쁜 꿈을 꾸진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마지막에 네가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잘 있어.'

 

 

 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줘.

 나중에 봐, 타로.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zZ (150120)  (0) 2015.03.14
[ㅇㅇㅁㄹ] 자유행동  (0) 2015.03.04
[ㅇㅇㅁㄹ] ㄴㅇ님 빵빵빵  (0) 2015.03.01
Posted by
,

 동생이 울고 있었다. 책상에는 텅 빈 공책이 펼쳐져 있었고, 거실에서 어머니가 기도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창 밖의 매미 울음 소리가 두 사람이 내는 소리 사이에 섞인다. 텁텁하게 데워진 공기에 숨이 막혔다.

 그곳에서, 그 좁은 집 안에서, 아야마루는 혼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내쉬는 조용한 숨소리는 다른 모든 소리들에 지워졌다. 묵직한 공기에 머릿속의 생각들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몰래, 모든 소리가 멎길 바랐다. 아주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더위도 울음소리도 기도도 전부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그 자신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동생의 어깨를 건드렸다.


 ……도와줄까?


 울음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동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움을 원하는 눈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간절하게. 아야마루가 가까이 다가가자 동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동생 대신 자리에 앉아, 연필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반, 성, 문, 공책의 윗쪽에 그렇게 적었다. 그 글자들에 시선이 고정된다.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그의 첫 일이었다.





*





 ㅡ……다녀왔습니다.


 인사와 함께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밖이나 다를 것 없이 집 안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오히려 더 추운 것 같기도 했다. 싸늘하게 식은 집 안에서, 어머니는 오늘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라는 인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야마루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거실을 지나,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갔다. 동생과 함께 쓰는 좁은 방에 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밖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겠지. 가능한 한 늦게 돌아오기 위해서.

 책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 공책을 펼쳐놓는다. 공책 맨 윗쪽에 반성문, 그렇게 적었다.

 그 옆에 동생의 이름을 적고, 한 자 한 자 반성문을 써내려갔다. 동생의 삐뚤빼뚤한 글씨를 흉내내는 것도 이제는 어렵지 않았다. 히라가나 さ를 ち로 잘못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는 오늘 친구와 싸웠습니다. 그렇게 적고, 그 다음 문장부터는 동생에게 들은 대로 자세한 이야기를 추가해나갔다. 친구의 이름, 싸우게 된 이유, 그 때의 기분. 그의 기억에 동생의 담임 선생님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동정에 호소할 수 있을만한 내용도 조금 적어넣었다. 마지막에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문장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아야마루는 조용히 연필을 내려놓았다. 딱 공책 한 장 정도의 분량. 성의 없어 보이지 않으면서, 초등학생의 의욕으로 쓸 수 있는 최대한의 길이. 이 이상 쓰는 것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겠지. 할 수만 있다면 더 길게 쓰고 싶은데, 조금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써놓은 반성문을 읽고, 다시 읽었다.



 그에게는 이상한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사죄의 재능, 용서 받는 재능이었다. 그가 적은 반성문을 동생이 가져갔을 때 선생님이 용서해주지 않은 적은 없었다. 다시 써오라는 호통도, 경멸의 눈빛도 없이, 동생은 조용히 용서 받았다. 오히려 그 후로 선생님의 태도가 묘하게 부드러워진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형제 사이에는 무언의 약속이 생겨났고, 동생의 반성문은 형의 몫이 되었다.

 아야마루 본인에게 있어서도 사과를 하는 것은 편한 일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그 말을 적을 때면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 속에 있던 아주 무거운 덩어리를 조금이나마 잘라 꺼내놓은 기분이었다. 그는 계속 계속 사과하고 싶었다. 비록 그가 직접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는 타인의 삶을 자기 삶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위치까지 끌어올리거나, 또는 반대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낮추는 것을 잘했으니까. 그래서 대신 사과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잘못을 받아들이며 사과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알기 쉽게, 용서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주는 것도. 그래서 그는 반성문을 쓰는 시간을 좋아했다. 다 써진 반성문을 보고 조금 안심한 듯한 동생의 표정도 좋아했다.



 거실에서 여전히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사과를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으면, 어머니처럼 비참해진다는 것을 그는 배웠다. 비록 '비참하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로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도 마음 속에 아주아주 무거운 덩어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매일의 기도로 그것을 잘라내려고 하고있다는 것. 그러나 아무리 잘라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그녀는 아마 오래오래 그 거대한 덩어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란 것. 그것이 아야마루가 이해한 비참함의 뜻이자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덩어리를 물려받았다. 어머니의 바람이 담긴 이름과, 그 이름에 걸맞는 재능과 함께. 그렇다고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타고난 성격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쪽의 길은 이미 그의 동생이 걷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그저 조용히 받아들이는 길을 택했다.

'…….'


 아야마루는 공책을 덮었다. 어머니는 내일도 기도를 할 것이다. 동생은 다시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그리고 아야마루 역시 계속 반성문을 쓸 것이었다. 끝이 있을까. 우리가 그 무거운 덩어리를 버리고 가벼워질 수 있는 순간이 올까.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없는 절망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언젠가는 올 것이었다. 짐을 버리고 홀가분해질 수 있는 날이. 그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랐다.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0) 2015.03.14
[ㅇㅇㅁㄹ] zZ (150120)  (0) 2015.03.14
[ㅇㅇㅁㄹ] 자유행동  (0) 2015.03.04
[ㅇㅇㅁㄹ] 사망로그 (150124)  (0) 2015.03.04
Posted b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