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백우진.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수많은 고민 끝에 집어들었을 그의 각오가 허무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긴 순간이었다. 그 소리와 함께 두 길의 사이가 벌어졌다. 내가 걸었던 길과 그가 걷게 될 길은 이제 영영 달라지게 되었다.
ㅡ…듣고 있어.
ㅡ…너였지. 여기서 사람 처음 죽인 거.
ㅡ…… ……그래. 나였지. 내가 시작했어.
ㅡ그럼… 나도…….
그는 실패했다. 이제 사람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 밤은.
아까 했던 대화 속의 박예환이 눈 앞에 있는 현재의 그와 겹쳐진다. 그 때의 그의 표정과, 중간중간 흐리던 말끝. 조용히 들려주던 이야기의 마지막에 그가 말했다.
ㅡ…근데 지금 와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지. 도와줄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내가 빨리 나가야 한단 말야.
ㅡ…….
ㅡ그리고 붓 잡을 손도 같이 안 다치고.
ㅡ…….
ㅡ그래서…….
그렇게 끊겼던 대화의, '그래서'의 다음에 이어졌을 말. 계속 흐려진 채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박예환이 말했다. 누나를 만나야 한다고.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돈을 벌고. 그리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누나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사람을 죽인다'는 길로 이어진다는 것이. 사실은 앞에 어떤 이유가 오더라도 죽인다, 는 말과 이어질 수 없어야 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말을 듣더라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안에서는, '죽인다'는 말은 어떤 순간에도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는 어떤 이유도 들어올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답은 간단했다. 누군가가, 그 둘 사이가 이어질 수 있다고 증명해버렸으니까.
네가 먼저 시작해서, 여기까지.
……눈 앞에서 박예환이 울고있다. 누군가가 눈 앞에서 울고 있는 상황이 현재진행형일 때, 그 순간이 믿을 수 없이 끔찍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지만, 그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늘어놓은 말들이 가슴 안쪽부터 천천히 쌓이는 것 같다. 차곡차곡 쌓인 말에 숨이 막힌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과 마주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감정은 언제나 연민이었다. 이런 곳에 온 것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조차 원망하지 못하는 무른 성격도. 아니면 지금까지 버텨오는 데만 온 힘을 쏟아야했던 인생도. 늘 그랬다. 타인을 향한 감상에 담긴 것은 깊은 연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연민도 있었지만, 그 연민의 밑바닥에 공감이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네가 느끼고 있을 막막함과 두려움과 슬픔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근거도 조심성도 없는 오만이 있었다. 차마 말로 꺼내진 못 할 뻔뻔한 생각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가려던 길의 끝에 서 본적이 있다. 둥글게 모인 책상과 영정 사진. 국화꽃. 스물 두 개의 시선이 나를 향하던 순간. 갑자기 안나예가 와서, 그래서…… 그 다음에 하려다가 삼켰던,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해 덧붙이려고 했던 수많은 이유들. 그 이유를, 눈 앞에 있는 그가 대신 말해준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우스운 꼴이다. 연민의 밑에 깔린 공감은 자기연민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건 조금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했던 생각을 박예환이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습관처럼 모자챙을 잡고 아래로 잡아내렸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
"……박예환."
이름을 불러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지 못했다, 고 하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문진을 들고 있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감정을 추스리기 힘든 것처럼 그의 숨이 떨린다.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오늘 본 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의 모습을 보고, 어쩌면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그가 조금 움직였다. 손을 들어서 눈가를 문지르다가, 힘겹게 입을 연다.
"그냥 들어갔다가… 내일 내가 뽑혀서 손까지 망가지면… 어떡하라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비통하게 들렸다. 그 말에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붓이 들려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다음에는, 그 손이 사라지는 걸 잠깐 상상하고 말았다. 너무 쉽게 잘려나가버린 윤지아의 왼손을 멀쩡한 그의 손 위에 겹쳐본다. 초고교급이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은 천재 동양 화가의 손. 책임져야 할 모든 것들은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의지하고 있던 재능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면. 그건 얼마나 끔찍한 기분일까. 저 자리에 선 게 나라면 견딜 수 있었을까.
잠시 상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결과적으로, 그 끔찍한 동기의 대상에서 나는 제외되었다.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그의 절박함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듯이, 죽은 자도 산 자의 눈 앞에 있는 공포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 자신의 모습을 끼워맞추며 어설픈 이입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늘은 너무 늦었어."
그래서 겨우 꺼낸 말은 그게 다였다. 늦었다는 건 시간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고른 말은 달랐지만, 넌 이미 실패했다고 말한 거나 다름 없었다. 그는 이쪽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문진을 향한다. 화를 낼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침묵 뒤에 돌아온 것은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었다.
"…그래. 역시 그런 거 같아."
"……."
"이런… 이런 거 저지르려면 첫 날에 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 못하겠어. 힘 없는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잠깐동안, 그랬다면 지금 너랑 내 위치가 반대가 됐을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죽고나서 오랜만에 그와 다시 대화했던 날을 기억한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살인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기 주저하고 있는 그였다. 그러니까 분명 그는 처음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복잡한 기분과 함께 마음이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나와 너는 다르다, 하고 마음 속에 못을 박았다. 못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공감은 천천히 빠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곧 연민만 남겠지. 나와 네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라는 말 안에 묶어보려고 하는 것도, 사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안 들어갈 거면 잠깐 이야기라도 할까."
다른 애들이 올지도 모르니까, 어디 들어가서. 그렇게 말하자 그는 잠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들어간 곳은 양호실이었다. 생각나는 가까운 장소 중에 가장 무난한 곳이었다. 적당히 앉을 곳도 있고 사람이 올 일도 아마 없다. 물론 제대로 이야기를 한다면 좀 더 나은 장소가 있었겠지만. 지금 시간엔 식당은 이미 닫혔고, 라운지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것도 꺼려졌다.
"……."
박예환이 양호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유령은 앉을 필요가 없었지만, 혼자 서있기도 어색할 것 같아 옆에 있던 간의 의자에 앉았다.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다. 양호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울적함이 조금씩 어색함으로 바뀌어 갈 때쯤, 먼저 입을 열었다.
"……울 건 다 울었어?"
솔직히 유치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어이 없다는 듯 박예환이 표정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운 적 없거든."
"……."
다행히, 질문이나 대답이나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래. 그것도 비밀로 해둘게."
"비밀은 무슨. 안 울었다니까. 헛소리 하지 마라."
잠긴 목소리로 대꾸한 그는 억지로 헛기침을 해가며 목을 풀었다. 그런다고 운 티가 안 나는 건 아니었지만. 본인은 나름대로 진지해보여 그냥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가 앉은 침대 위,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까 그가 떨어뜨렸던 문진이 있었다. 아마 한동안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의 여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까…… 네가 했던 말 중에. 정정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 말에 그가 멈칫한다. 아까, 라는 말에 그의 안색이 확연하게 안 좋아졌다. 다른 곳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려야 할지 주저하는 게 보인다. 조금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뭔가 말하려는 듯 그가 한참 말을 골랐다. 야, 아까 내가 했던 말은… 그러니까. 그 다음에 올 말을 필사적으로 찾는 것 같다가, 결국에는 어떤 말이 돌아와도 받아들이기로 각오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문다. 창백하게 질린 옆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무엇을 신경쓰고 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너 때문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는 한 번도 내 눈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박예환을 포함해서, 여기 있는 아이들은 너무 마음이 약하다. 그건 사실 아주 옛날부터 들어야 했던 말이었다. 모두 사실이었고,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 스스로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던 말이기도 했다. 줄곧 누군가 그 말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니까, 정정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나처럼 멍청하게 쓸 데 없는 증거 안 남길 거라는 말."
"……뭐야, 너. 설마 그 와중에 멍청하다고 해서 화났냐? 그보다 더한 말도……."
"그게 아니라."
"그럼 뭐."
"네가 나보다 훨씬 어설펐을 거라는 말이었어."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이게 진짜."
얼굴을 한껏 찌푸린 그가 이쪽을 노려본다. 아무래도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즉각 돌아오는 반응에 피식 웃자 그의 표정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웃어? 좋냐? 네가 더 잘할 것 같으니까. 웃기는 자식이네 이거."
"아니, 그냥."
떨어뜨려서 다행이라고. 아주 작게 말하자 못 들었는지,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라는 거야, 들리게 말을 해. 박예환이 불평했고,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불평을 흘려보냈다. 그 후로는 쓸 데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끝없는 말로 조금 전까지의 일을 덮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쭉 계속되었다.
"조금만 있으면 7시가 되겠는데."
"뭐? 미친. 여기 시간 가는 거 진짜 이상하다니까."
"이제 슬슬 들어가는 게 어때. 곧 나도 안 보이게 될 텐데."
그 말에 그는 잠시 이쪽을 봤다가, 시선을 돌려 옆에 놓아두었던 문진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문진은 깨끗하다. 피가 묻지도 않았고, 닦아내야 할 것도 없었다. 그게 오늘 새벽의 결론이었다.
"그…… 래."
"……."
"들어가야지. 이제 와서, 어쩌겠어."
그렇게 말하며 박예환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은 여전히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같이 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같은 말은 소용 없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분명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박예환이 되었든, 다른 사람이 되었든. 그러나 이미 기회를 놓친 사람에게는 이제 기다리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개인실까지 배웅이라도 해줄까."
"됐거든. 징그럽게."
넌 지금 안 가냐. 나는 조금 있다가 가려고. 대답을 들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보이는 얼굴이었다. 들어가면 잘 수 있으려나. 아마 힘들겠지. 반대로 피곤해서 금방 잠들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의 뒷모습을 보고있다가 문득,
"박예환."
"응?"
이름을 부르자 그가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잠깐동안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시 다물었다.
"……가서 잘 쉬어."
"어. ……너도 그, 쉬어라."
가벼운 인사 뒤에 박예환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문을 열고 양호실을 나섰다. 문을 닫다 말고, 다시 한 번 이쪽을 힐끔 본다. 잘 가.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는 멈칫했다가 작게 끄덕였다. 마침내 문이 닫혔다. 시계를 보자 6시 50분을 조금 넘어간 시각이었다. 조용했던 새벽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
…
……
………
사람을 죽이기로 했다.
그렇게 다짐했던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성공했다. 너와는 다르게. 우연히 그곳에 나와있었을 뿐인 죄 없는 여자애 하나를 죽였다. 그 때 그 결과가 눈 앞에 있었다. 느껴질 리 없는 한기가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다. 지금은 굳게 닫힌 냉장고의 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다. 싸늘한 냉장고의 좁은 칸에 들어있는 것. 까맣게 타버린,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 무언가. 죽었다, 는 말의 본질은 이 안에 있다. 유령 같은 건 있어선 안 될 찌꺼기일 뿐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죽은 사람의 모습은 이게 전부다. 억지로 포장해서도 잊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 날 네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결국 할 수 없었지만.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고 싶었다.
너는 이렇게 되지 마.
- - - - - - - - - - - - -
맨 앞 대화는 새벽에 둘이 마주치기 전 오후쯤?에 예환이 자유행동에서 했던 대화에요!
마지막 부분은 생물실 처음 열린 날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
아… 이쪽으로 오지마 예환아…… 예환이… 왜 죽었냐 진짜…… 내 단로리 최애들 다 죽는다……………
'자캐 로그 > 커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ㅅ....생.... (0) | 2015.08.29 |
---|---|
. (0) | 2015.08.28 |
인간쓰레기 (0) | 2015.07.26 |
[ㅇㅇㅁㄹ] 지금이나 (150128) (0) | 2015.03.14 |
[ㅇㅇㅁㄹ] 옛날이나 (150128) (0) | 2015.03.14 |